#디지털 근력 운동기구를 개발한 재기기업인 정진영 씨는 얼마 전 일본의 유명 유통업체로부터 거액의 계약 문의를 받았다. 무게추를 사용하던 기존 헬스기구와 다르게 버튼 하나만 누르면 무게 조절이 가능해 일본의 주요 소비자계층인 노인들에게 최적의 제품이었던 것. 하지만 계약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계약 조건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공장설비 자금과 양산화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한 대기업으로부터 영업·마케팅 협업 의뢰도 왔지만 이 역시 성사되지 못했다. 정 씨는 "재창업자금을 받아 사업을 다시 시작한 뒤 재기기업인으로서는 드물게 정부와 지자체 연구개발(R&D) 지원사업에 연이어 선정되며 시제품까지 완성할 수 있었다"며 "하지만 본격적인 양산화를 앞두고 민간 투자의 문을 두드려봤지만 냉담한 반응만 돌아왔고 정부에서도 재도전 관련 펀드가 아직 시행되는 게 없어 답답할 나름"이라고 하소연했다.
4일 중소업계에 따르면 한번 사업에 나섰다가 실패를 경험한 뒤 재도전을 하는 기업인 가운데 상당수가 본격적인 사업화를 앞두고 '투자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래부와 중기청 등 관련 부처가 벤처 생태계 구축의 일환으로 재창업 활성화에 의욕적으로 나선 결과 재기 기업인들의 수는 갈수록 늘고는 있지만 정작 사업화 시점에 자금을 수혈할 투자 생태계는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엔젤투자매칭펀드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2013년 재도전 종합대책'의 핵심 중 하나로 엔젤투자를 받은 재도전 기업인에 한해 1대 2 매칭 지원을 해주는 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재도전 기업인에 대한 엔젤투자 기록은 미미하다. 중기청에 따르면 2013년, 2014년에는 매칭펀드를 통해 투자를 받은 기업은 각각 3건에 불과했으며 올해 역시 6월 현재 8개 기업에 불과하다. 금액 역시 2013년부터 현재까지 23억원이 나간 것을 고려하면 실제 현장에서 집행된 엔젤투자는 약 11억원 수준에 그친 것으로 파악된다.
엔젤투자를 받은 재기기업인 A씨는 "엔젤투자를 받지 못하면 회사가 무너진다는 절박감에 본업인 사업은 후순위로 두고 엔젤투자를 받기 위해 1년 넘게 전국을 돌아다니며 100번이 넘는 PT를 하고 나서야 겨우 한 건의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
이외에 미래부가 모태펀드와 KIF(Korea IT Fund)를 통해 정보통신기술 분야 재도전 펀드를 150억원 규모로 실시하고 있고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을 통해 민간투자연계 지원사업(K-Global 재도전기업 민간투자 연계 지원 사업)도 최근 신설했지만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재도전 펀드의 경우 조성된 액수 자체가 작고 이 중 40%는 재기 기업이 아닌 곳에 투자가 가능해 현실적으로 재기 기업이 수혜를 입는 경우는 드물다. 아울러 재기 기업 설립년도에 대한 투자규정이 없는 탓에 데스밸리에 처한 기업보다 이미 안정적으로 매출을 일으키는 기업에 자금이 쏠릴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유동성 공급자(LP)인 모태펀드가 지난해에는 90억을 출자했지만 올해에는 실적이 전혀 없어 추가적인 재도전 펀드 조성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이에 업계에서는 재도전기업 투자가 전형적인 시장실패의 영역인 만큼 정부가 지금처럼 '엔젤투자만 받아오면 매칭 자금을 해주겠다'는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역할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모태 펀드가 들어간 취지에 맞게 설립 연도와 매출 등을 감안해 데스밸리에 처한 재기기업인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투자 규정을 구체화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영달 동국대 교수는 "사전에 재도전 전문 엔젤을 별도로 선발해 관련 민간투자 활성화에 앞장서게 하고 이들을 정부 주도 재도전 전용펀드 운용 심사위원으로 참여시키면 애초 목적에 맞는 투자 집행 효과가 생길 것"이라며 "아울러 처음 설립되는 재도전펀드는 운영자금 중 10%를 별도로 출연해서 이를 바탕으로 엔젤투자조합을 설립하면 관련 투자가 활성화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