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가 중요산업에 대한 외국인들의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방지하기 위해 사전 심사, 승인을 골자로 하는 관련법 시행령 개정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이 같은 사실을 밝히면서 (삼성전자ㆍ하이닉스반도체 등) 전자업체들은 법 적용대상에서 사실상 배제시킬 것이라고 말해 국가 중요산업 보호라는 법 개정의 취지와 어긋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23일 재경부에 따르면 권 부총리는 지난 22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국가 중요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의 M&A을 제한할 수 있는 대통령령에 준하는 법 조항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현행 외국인투자촉진법 시행령에 ‘본질적 국가안보 이익’을 저해하는 외국자본의 M&A에 대해 경제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외국인투자심사위원회가 허가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는 새 규정을 넣을 방침이다. 그러나 권 부총리는 삼성전자ㆍ하이닉스ㆍ포스코 등이 보호 대상이 될 것이라는 일부 국내 언론들의 보도에 대해 “전자업체가 국가적으로 중요한 산업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혀 삼성전자ㆍ하이닉스 등은 보호 대상 국가중요산업군에서 배제할 방침임을 시사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정부 방침과 관련, 우리 정부가 입법화 초기단계에서부터 규제 최소화 논리에 얽매어 국가 중요산업 보호의 실효성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미국은 지난 1988년 엑슨플로리어법을 제정, 국가 중요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에 대해 재무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외국인투자위원회(CFIUSㆍCommittee on Foreign Investment in the U.S)가 실무조사 및 최종결정 등 전권을 가지고 있다. 특히 법 자체는 ▦외국인투자에 대한 조사권한 부여 ▦시행절차 및 기간 등 중요사항만 간략하게 수록해 사실상 CFIUS가 ‘본질적 국가안보 이익’ 침해 여부를 판단하는 이른바 ‘포괄적’ 규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기업을 인수할 계획을 가진 해외자본은 사전에 엑슨플로리어법 적용 가능성에 대한 사전 법률검토 작업을 필수적으로 거칠 만큼 사전 억제력이 상당하다는 평가다. 송종준 충북대 법학과 교수(상사법)는 “미국이 본질적 국가안보 이익에 대한 구체적 해당근거를 법적으로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규제의 적용 범위가 폭 넓게 활용되고 있다”며 “이는 해외 적대적 자본의 위협으로부터 국가안보는 물론 사실상 ‘경제안보’까지 고려된 전략적 규제 효과를 얻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CFIUS의 결정은 사법적 심사대상에서도 제외될 만큼 엑슨플로리어법이 위원회에 강력한 힘을 실어줬다는 점도 규제의 실효성을 높였다는 지적이다. 반면 정부는 포괄적 규제 방식이 아닌 구체적 제한 업종과 내용을 시행령에 명시하는 방향으로 입법을 추진 중이어서 국가 중요산업 보호의 실효성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게다가 위원회의 결정 권한에 대해서도 아직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입법 주무부처인 산업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현행 외국인투자촉진법상에서도 이미 298개 업종에 대해서는 M&A가 제한돼 있다”며 “관계부처 간 협의 후 구체적인 제한 업종 등을 대통령령을 통해 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도 “엑슨플로리어법은 국제적으로 유례가 많지 않고 외국인 투자를 저해할 가능성이 크다”며 포괄적 규제 방식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강력한 M&A 장벽이 외국인 직접투자 확대라는 경제적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취지다. 그러나 송 교수는 “엑슨플로리어법으로 지난 20년 간 실제 M&A 철회 결정이 내려진 건 89년 단 한건에 불과한 반면 상당수가 조사과정에서 자진 철회를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더구나 업종의 다변화가 빠르게 이뤄지는 상황에서 특정 업종만 규제 대상으로 열거하다가는 적대적 M&A에 대한 사전 억제력 확보라는 법 개정의 실익이 더더욱 훼손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엑슨플로리오(Exon Florio)법이란 지난 80년대 일본 기업의 인수합병(M&A) 공략에서 미국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88년에 제정됐다. 일본 후지쓰가 미국 반도체 회사 페어차일드 인수를 시도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돼 상원의 엑슨 의원과 하원의 플로리오 의원이 공동 발의한 의원입법. 대통령에게 외국인의 지배를 받으면 국가안보를 해칠 우려가 있는 미국기업의 M&A에 대한 조사권한 및 M&A 금지 권한을 부여하고 이 결정은 사법심사의 대상도 되지 않는 막강한 결정권을 지닌다. 최근에는 생명공학ㆍ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뿐 아니라 에너지와 통신 등 정부와 공급계약을 맺는 거의 모든 기간산업에 확대 적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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