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순위를 가르는 대표적인 기준은 자산이다. 그리고 자산성장률을 가늠하는 척도로 주로 쓰이는 게 원화대출이다. 이는 은행업이라는 것이 국가 기반산업이며 은행은 국내 기업과 가계의 원활한 자금순환에 기여해야 한다는 일반적 정의에 따른 것이다.
통상 시중은행의 원화대출은 지방은행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전국을 무대로 하는 시중은행과 달리 지방은행의 역할은 자기 지역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중은행>지방은행'의 부등호식도 이제 옛말이 됐다. 지방은행의 역습이 시작된 것이다.
23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방은행인 부산은행의 원화대출 규모가 시중은행인 씨티은행을 뛰어넘은 것으로 나타났다. 올 6월 말 현재 부산은행의 원화대출액은 24조8,933억원으로 씨티은행(23조9,957억원)보다 8,976억원 많다. 지방은행이 시중은행보다 원화대출 규모가 앞선 첫 사례다.
이러한 추세는 3ㆍ4분기에도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 3ㆍ4분기 실적발표가 끝나지 않아 공식적인 통계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부산은행의 성장세가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부산은행의 원화대출금은 6개월 만에 무려 2조268억원이 늘어난 반면 씨티은행은 같은 기간 1,061억원이 줄었다.
상대적으로 양호한 지역경기가 지방은행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는데 부산은행의 텃밭인 '부울경(부산ㆍ울산ㆍ경남)'만 해도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는 수도권 부동산경기와 달리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하반기 들어 열기가 다소 식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운이 남아 있다.
한 지방은행 관계자는 "영남 지방은행들이 자기 권역에 '올인'하는 것은 시중은행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고 또 그만큼 금융수요가 많기 때문"이라며 "지방은행의 계열사 중 캐피털만 해도 전체 업계가 위축된 와중에 고속성장을 구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지방은행들의 원화대출 공급확대는 시중은행들과 비교할 때 더욱 돋보인다. 시중은행은 '리스크 관리'라는 명분 아래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떨어지는 중소기업과 가계대출에 소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부실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지만 절실한 자금수요를 외면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총자산 측면에서는 시중은행이 지방은행을 크게 뛰어넘지만 '지방은행이 시중은행의 지위를 넘본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다. 6월 말 현재 씨티은행의 총자산은 61조5,746억원으로 부산은행(37조7,277억원)을 압도한다.
다만 자본금 대비 상대적으로 큰 규모의 대출자산은 '부실관리'라는 숙제를 안겨준다. 아무래도 지방은행의 리스크 관리 능력이 뒤처지다 보니 대출자산 확대가 자칫하면 부실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전북은행은 웅진 사태 여파로 150억원가량의 충당금이 발생했다.
한 지방은행장은 "속도 조절 차원에서 최근 하반기 자산성장 목표치를 낮춰 잡았다"며 "지금처럼 지방경기가 수도권에 비해 활기를 띠는 한 지방은행의 역할은 보다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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