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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 인사이드] 유명무실해진 권장소비자가격

대형마트 연중 할인 행사에 걸핏하면 묶어팔기·끼워팔기<br>대형유통업체들이 甲의 위치서 가격결정권도 사실상 가지는 셈<br>소비자 입장선 싸게 사서 좋지만 원가 줄여 질 낮은 제품 만들수도



지난 6월 공정거래위원회가 신라면블랙에 대해 허위, 과장 광고를 이유로 1억5,0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의 결정에는 1개당 1,600원으로 책정된 신라면블랙의 가격이 적정 선을 벗어났다는 가치판단이 녹아있다. 하지만 신라면블랙은 원가가 공개된 적이 없다. 또 가격이 비싸다는 느낌도 시중에서 팔리는 일반 라면 제품과 비교에서 나온다. 엄밀히 말해 그저 비싼 것 같다는 감만 존재할 뿐 객관적인 판단의 근거는 부실하다. 신라면 블랙 파동, 원두커피 등에 대한 이마트의 가격 파괴 실험, 대형마트에서 연중 행사나 다름 없이 실시되는 각종 식품 할인 행사 등은 식품의 권장소비자가격이 얼마나 모호하며 신뢰하기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예컨대 대형마트에서 1개 제품의 가격으로 2개 제품을 샀다면 절반가격에 구입한 것일까. 이런 행사가 연중 계속되는 것을 볼 때 '권장소비자가격은 정말 타당한 걸까'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생긴다. ◇가격은 제조업체가 아닌 대형유통업체가 결정= 지난 10월 농협 하나로마트가 서울우유의 인상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퇴짜를 놓았다. 서울우유가 유통업체들에게 납품가 인상을 알리면서 일선 매장에서 파는 흰 우유 소매가를 2,150원에서 2,350원으로 ℓ당 200원 정도 올리도록 권고했지만 하나로마트가 2,300원으로 ℓ당 150원만 인상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사례는 유 업계의 절대 강자로 통하는 서울우유에게 인상 가격을 재고하라고 으름장을 놓을 정도로 유통업체의 힘이 막강해 졌음을 보여준다. 2000년대 중반을 전후로 대형 유통업체는 매장 수가 100개 전후로 급격히 늘어나면서 대부분의 제조업체에 대해 갑의 위치에 섰다. 유통업체의 입김에 대항할 수 있는 제조업체라고 해봐야 농심(신라면), 동서식품(맥심), 풀무원(두부), CJ제일제당(햇반, 스팸 등) 등 극히 일부 대기업에 국한된다. 대형마트로 기운 저울추가 표면적으로는 소비자 가격을 낮추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마트, 롯데마트 등은 전 점포를 대상으로 1주일에 한번씩 수십 개 품목을 정해 할인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연중으로 치면 52번 정도 할인행사를 하는 셈. 특히 이마트 주도로 불붙은 최저가 할인 경쟁으로 할인행사는 곧 연중 행사로 봐도 무방할 정도가 됐다. 한 식품 기업 관계자는 "사은품 붙이기, 제품끼워팔기 등의 프로모션을 길게는 2~3개월, 짧게는 일주일 가량 거의 쉬지 않고 하고 있다"며 "후발주자거나 마이너 업체들은 마케팅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할인 행사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형마트 쪽에서 강압적으로 할인행사를 요구하기도 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더러는 대형마트가 사전 협의도 없이 할인행사를 진행하고 난 뒤 제조업체에 통보해 납품가를 내릴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며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매대 배정 등에 있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롯데제과, 오리온, 해태제과 등 내로라하는 제과업체들도 제품 가격을 매길 때 대형 유통업체와 사전 협의를 거친 후에야 가격을 최종 결정한다. ◇잦은 할인행사 소비자에게 '약'인가 '독'인가= 대형마트의 할인 경쟁은 소비자에게 득이 될까. 품목마다 다르겠지만 제과나 라면, 만두 등 가공 식품의 경우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 대형마트가 지역 상권을 독식하는 등의 문제와는 별개로 식품 구입에 있어 소비자들의 편익이 높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적지 않다. 식품 업체들은 유통업체의 잦은 할인 요구가 제품 가격 상승을 유인하는'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뉘앙스를 공공연히 풍긴다. 유통업체의 할인 등쌀에 신제품을 출시할 때 가격을 높게 매기거나 '고급''프리미엄'이란 외피로 포장해 애초부터 원가 대비 이익률을 높여 잡는 제조업체가 드물지 않게 있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잦은 할인행사를 대형업체와 제조업체간 커넥션의 산물로 보기에는 요즘 시스템 자체가 많이 투명해졌다"며 "아이스크림의 경우 싸게 많이 팔면 유통비용을 줄일 수 있어 이런 판매전략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할인행사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측면이 있지만 가장 큰 판매채널에서 덤핑 판매가 너무 많다 보니 가격 책정 시 가격을 올리려는 유혹은 크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여기에 상시적인 최저가 할인 경쟁은 제조업체들의 원가 줄이기 경쟁을 촉발시키거나 가격 담합 행위를 만연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가뜩이나 정부의 가격 단속으로 이익이 하락한 기업들은 원가 경쟁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고 이는 제품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상시적인 할인 행사가 질 낮은 제품을 유인할 수 있다는 점은 유통혁명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권장소비자가격 부활 큰 의미 없어= 정부가 라면, 과자, 빙과류 등에 대해 야심 차게 실시했던 오픈프라이스 제도가 지난 8월 1년 만에 폐지됐다. 오픈프라이스는 제품 가격을 제조사가 아닌 유통업체에게 매기게끔 하는 제도. 그런데 원가 상승에 시달리던 식품 기업들이 가격을 스스로 매기는 부담을 벗어 던지게 되자 유통업체에게 공급하는 납품가를 슬그머니 올리고 책임은 유통업체에 떠 넘기는 행태가 만연했던 것이 제도 폐지의 이유였다. 정부는 올 연말까지 권장소비자 가격을 다시 표기하라고 통보한 상태다. 그러나 아직 기업들의 움직임은 뜨뜻미지근 하다. 제도 시행 전인 1년 전 가격으로 가격을 되돌리려니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묶어 팔기와 끼워팔기가 흔히 일어나는 대형마트에서는 권장소비자가격의 부활이 큰 의미를 갖긴 힘들다. 문제는 권장소비자가격이 다시 매겨지면서 가격의 등락이 한눈에 드러나는 편의점과 개별 슈퍼 등 상대적으로 작은 유통채널이다. 제조업체 입장에서는 대형마트에게 터지고 오픈프라이스제도 폐지로 편의점과 슈퍼 등에서도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 셈. 한 제과업체 관계자는 "정부가 그토록 정조준하고 있는 식품 가격이 실제 물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겨우 2~3%에 불과하다는 조사도 있다"며 "제품 가격을 다시 다 표기해야 하는 데 골치가 아플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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