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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인생] 18. 눈물 나는 걸레질

1974년 12월 중순 제본소에서 책을 모두 치워 달라고 했다. 나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제본소 한켠에 책을 쌓아 놓다 보니 마음이 편하지 않은 터였다. 밤잠을 설쳐가며 기획하고 고심 끝에 출간한 책 위에 쌓인 먼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남들이 볼 때는 그냥 `책`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막연한 `책`이 아니라 땀과 혼이 들어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제본소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한두 권씩 가져가는 일도 잦았다. 그래도 책을 보관할 수 있어 고맙게 여겨 왔는데 제본소 사장이 바뀌면서 연말 안으로 치워 달라는 부탁을 받고서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 해 12월31일 보관 중이던 1,000여 권의 책을 작은 트럭에 실어 석관동 집으로 옮겼다. 집이라고 해봤자 작은 부엌 하나 딸린 단칸 셋방이었는데 빈 구석에다 가져온 책들을 쌓아 놓았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이나 책을 가지러 시내에서 집을 와야 해 낭비되는 시간이 너무 많아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몇몇 사람들이 집을 보러 오는 것이 심상치 않아 확인을 해보니 우리가 세든 집이 채권자에게 넘어가 경매에 부쳐져 있었다. 결국 75년 1월 초 이사한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다시 집을 옮겼다. 그 후 신간을 내기 위해 알뜰하게 모았던 자금을 축내 종묘 앞 낡은 기와집의 부엌 딸린 방 한 칸을 창고로 쓰기로 했다. 부엌 바닥에 널판지를 깐 다음 책을 쌓고 방안에는 중앙시장에서 구입한 헌 책상을 사서 들여놓았다. 내가 만든 책 옆에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 얼마나 흐뭇하던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전화가 없다 보니 사무실로는 쓸 수가 없었다. 1월 중순경 지방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깜짝 놀랐다. 부엌에 쌓아 두었던 책들이 온통 시커멓게 그을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불 한번 땐 일이 없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니 안집에서 불을 때면(연탄도 아닌 나무를 때던 집이었다) 연기가 내가 세를 내서 쓰고 있는 방쪽의 아궁이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주인집에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걸레로 그을음을 닦았다. 고단한 출장 길에 이어 불 한번 때지 않은 냉방에서 몇 백 권의 책을 닦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뼈 속 깊숙이 추위가 몰려들었고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서러움이 목을 메이게 했다. 내일 당장 서점에 배본 할 분량을 닦았을 때는 날이 어두워져 있었고 온몸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는 그날부터 지독한 감기 몸살을 앓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열이 나서 밤새 끙끙 앓으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려니 그야말로 몸이 천 근이나 된 듯 힘겨웠다. 그렇다고 팔자 좋게 앓아 누워있을 형편은 아니었다. 이를 물고 집을 나가 서점을 돌면서 배본을 했다. 돌이켜 보면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그나마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었다. 1월말이 되어 지난 1년 동안 실적을 결산해 보니 처음 갖고 시작한 자본금(111만원)의 4배 이상 불어 있었다. 빚은 이미 갚았고, 서점에 깔아놓은 책들이며 얼마간의 재고도 자산이고 통장에는 여유자금도 제법 들어 있었다. `1년 전 출판을 시작할 때 얼마나 걱정이 많았던가.` 직장을 그만 두는 것에 대한 불안이며 출판을 시작해서 가족들을 굶기지나 않을까,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온갖 걱정과 불안 속에서 시작했던 일이었다. 다행히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이루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자랑스럽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 시작이 반이야. 열심히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는 거야.` 결산내용을 들여다보는 나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것은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춘호 예림당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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