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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제일모직이 18일 상장하면서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이어지고 있다. 제일모직 상장 과정에서 순환출자 구조가 더욱 단순화됐지만 '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출자구조가 갖는 한계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오너 일가가 삼성을 지배하려면 궁극적으로 삼성전자 지분을 얼마나 들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지금까지 이건희 회장 본인의 지분 3.38%와 삼성생명 지분 20.76%를 통해 안정적으로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행사해온 것과 달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직접 소유한 지분이 0.57%에 불과하다. 따라서 삼성가 오너 3세들의 지분이 38.6%에 달하고 삼성생명 지분을 19.34% 보유하고 있는 제일모직이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핵심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재계 안팎에서는 중간금융지주회사를 허용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이 내년 상반기 중에 이뤄질 경우 삼성이 지주회사 전환을 선언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를 분할한 뒤 제일모직과 합병하는 시나리오를 유력하게 점치고 있다.
◇자사주 매입·상장 통해 지주사 전환 준비작업 마무리=삼성은 올 들어 주요 비상장회사인 삼성SDS와 제일모직의 상장, 삼성전자의 7년 만의 자사주 매입, 금융계열사 간 지분 정리 등 굵직한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숨 가쁘게 진행했다. 삼성은 이에 대해 순환출자 구조 단순화와 사업 경쟁력 강화 차원이라고 설명했지만 전문가들은 지주사 전환을 염두에 둔 사전 정지작업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삼성전자 자사주 매입은 삼성전자의 인적분할(지주+사업회사 분할)에 유리하고 삼성생명으로 금융 계열사 지분을 모은 것은 중간금융지주회사로 가는 과정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회사를 인적분할하면 자사주가 지주회사로 넘어가면서 의결권이 부활해 사업회사를 지배할 수 있다. 총수일가가 지주회사만 손에 쥐면 분할 전 매입한 자사주의 의결권을 통째로 얻는 셈이다. 이 때문에 지난달 이뤄진 삼성전자의 자사주 매입 발표로 인해 지주사 전환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장의 예상대로 삼성전자가 인적분할에 나서면 삼성SDS와 제일모직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3남매가 보유하고 있는 삼성SDS 지분을 삼성전자 지주사에 현물로 출자하고 이후 제일모직까지 합병하면 오너 일가의 삼성전자 지주사에 대한 지분율이 30% 이상으로 높아진다"고 주장했다. '오너 일가→삼성전자 지주사→삼성전자 사업회사'의 구조로 삼성전자에 대한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높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내년까지 지주사 전환을 위한 현물출자에 대해서는 과세 이연돼 양도소득세를 물지 않아도 된다. 삼성SDS·제일모직 상장으로 막대한 시세차익을 거둔 오너 3세들은 절세 측면에서 이 방식을 따를 가능성이 크다고 박 교수는 예상했다.
◇내년 상반기 지주사 전환 선언 전망도=삼성의 지주사 전환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삼성생명이다. 금융업과 비금융업을 떼어놓는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삼성 지주회사가 생기면 삼성생명을 지배할 수 없다. 또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금융사의 비금융사에 대한 의결권이 축소되고 보험사의 계열사 지분 보유 한도를 제한하는 보험업법 개정안도 국회에 제출돼 있는 상태여서 법이 통과될 경우 중장기적으로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보유지분(7.21%)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을 맞는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바로 중간금융지주회사 설립이다. 정부·여당은 중간금융지주를 허용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을 추진 중이어서 법이 통과되면 삼성이 지주사 체제로 전환을 선언하고 중간금융지주를 통해 삼성생명을 지배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늦어도 내년 초 임시국회에서 공정거래법을 통과시키겠다는 입장이다. 삼성이 중간금융지주사를 설립하면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도 자연스럽게 제일모직 등 다른 계열사로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관련, 삼성은 "지주사 전환에 관한 그룹 차원의 공식 입장은 정해진 게 없다"며 "지주사 전환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데다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당장은 쉽지 않을 걸로 본다"고 말했다. 삼성은 지주사 전환 비용으로 15조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가치와 비슷하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소요되는 비용이 예상보다 많지 않고 막대한 상속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는 만큼 삼성이 향후 2~3년에 걸쳐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순환출자 구조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선진적인 지배구조는 아니다"라며 "삼성으로서는 3세 경영체제에서는 불완전한 현 지배구조보다는 지주회사 체제를 적극 검토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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