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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이민가겠다" 부자들 분노 폭발
[선거에 휘둘리는 조세정책] 소득세 - 누수만 막아도 증세 부담 던다
민병권기자 newsroom@sed.co.kr
이연선기자 bluedash@sed.co.kr
"증세" 목청에 "차라리 이민"… 부자들 엑소더스 시작되나
세금부담 급격히 늘어나면 양성화된 과표마저 지하로 세수 증대효과 기대 못미쳐
탈세 수법도 갈수록 지능화… 증세보다 새는 세금 잡아야
은퇴 이후 부동산 임대와 금융이자 소득으로 살고 있는 박창현(64ㆍ가명)씨는 요즘 캐나다 은퇴이민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오래 전 자녀들을 캐나다로 이민 보내고 나서도 노후는 고향에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해온 터였다. 그런 그가 마음을 고쳐먹으려는 것은 세금 때문이다. 정치권의 추세 등을 보니 소득세를 자꾸 올린다고 하고 현 정부의 종합부동산세 폐지 약속은 공염불이 되는 듯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가뜩이나 주택 등 자산 값이 속락하고 예금이자 수입은 저금리 탓에 신통치 않은데 굳이 한국에 남아 세금폭탄까지 맞느니 맘 편히 떠나겠다는 것이다.
자산가들의 재테크 상담을 도맡고 있는 은행 프라이빗뱅커들에게 박씨의 사정은 유난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 고객 중에는 ‘세금 무서워 이민을 가겠다’는 식의 상담이 적지 않다고 한다. 부자들의 엑소더스 문의가 늘자 신한은행을 비롯한 주요 은행들은 지난 몇 년간 간간이 투자이민 설명회를 열곤 했는데 그때마다 행사장이 만원이었다.
납세자들이 떠나면 아무리 세율을 올린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누진세의 특성상 소득세 부담은 고소득자들이 많이 진다. 근로소득세만 해도 지난해 소득상위 10% 계층이 총세부담의 67.7%가량을 졌다. 상위 20% 계층까지 포함하면 비중은 80% 중반에 달한다. 소득세뿐 아니라 각종 사회보험료 등 준조세까지 포함할 경우 고액 소득자들은 많게는 소득의 40% 이상을 떼인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런데도 정치권이 ‘부자증세’를 외쳐대니 고소득자들은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
조세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최고세율 적용 기준소득은 평균임금 대비 3.1배에 이른다. 올해부터는 기준소득이 지난 2010년의 3.4배로 인상됐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 국민부담률이 34%이고 소득수준이 평균임금의 2배 정도만 되면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것과 비교하면 그만큼 적용 대상이 적다. 안종석 조세연 선임 연구위원은 “소수의 일부 계층에만 높은 세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조세회피ㆍ비효율성 등 부작용을 극대화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후폭풍을 감당할 수나 있는지 여야는 한결같이 증세 도그마에 빠져 있다. 현행 소득세법은 납세자의 소득(과세표준 기준)수준에 따라 6~38%의 누진세율을 매긴다. 정치권에서는 이 중 최고세율을 현행 38%에서 42%로 인상(안민석 민주통합당 의원안)하자는 의견을 포함해 다양한 세율인상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또한 현재 과표 3억원 이상 소득자에게만 적용되는 최고세율을 과표 1억원 초반이나 중반선까지 확대 적용하자는 의견도 분분하다. 이들 부자증세론자는 소득세 최고세율 인상 및 적용 과표계층 확대를 통해 연간 1조원 이상의 세수를 거둘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그러나 세정당국은 이 같은 전망을 반신반의한다. 세부담이 급격히 커지면 조세저항도 그만큼 거세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명목세율이 올라도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탈세 등으로 회피하는 납세자들이 늘어 세수증대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는 뜻이다. 탈세의 근원인 지하경제(공식 통계로 파악되지 않는 경제활동) 규모는 이미 우리나라 1년 경제규모의 3분의1에 육박한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009년 작성한 ‘지하경제 개념ㆍ현황 및 축소방안’에 따르면 지하경제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28%에 육박한다. 그만큼 정부가 걷어들여야 할 세금이 덜 걷히는 셈인데 지하경제로 숨은 과표만 더 적극적으로 발굴해도 상당수의 세수가 확보돼 증세부담을 덜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지하경제는 정부의 꾸준한 과표양성화 정책에 힘입어 추세적으로는 줄어들고 있다. 조세연구원 성명재 박사의 조사에 따르면 사업소득세의 총 탈루소득 규모가 2006년에는 GDP의 무려 4.8%가량으로 추정됐지만 2008년 무렵 0.7%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부 납세자들이 차명으로 은닉한 재산들도 국세청의 추적으로 점점 몸통을 드러내고 있다. 서울경제신문이 31일 입수한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올 6월 현재 세무당국이 포착한 차명재산 규모는 1조5,819억원(7,836건)에 이르며 특히 유가증권이 그 중 80.4%(1조2,725억원)나 된다. 국세청은 아직 파악되지 않은 차명재산 규모가 훨씬 클 수 있다며 추적의 고삐를 더 조이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정부의 과표양성화 움직임에 정치권이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적 공감대 없이 세부담이 급격히 늘면 그나마 양성화된 과표마저 지하경제로 숨어들게 된다. 심지어 최근 일부 대선공약 가운데는 세금계산서 발행의무를 면제받는 간이과세자를 확대하겠다며 도리어 탈세 위험을 높이는 경우마저 있다.
한 정책 당국자는 “지금은 증세보다 누세(탈세 등 세금누수)를 막는 게 더 중요하다”며 “탈세수법이 날로 지능화하고 국제화해 이를 차단하기 위한 인력과 인프라 지원에 정치권이 앞장서는 것이 국가재정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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