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신문이 금융산업의 변혁기를 맞아 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장 등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진행한 긴급설문에서는 생존을 위해 금융산업의 판 자체를 해체하는 것도 불사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절절히 묻어났다.
금융 당국의 서슬 퍼런 칼날과 포퓰리즘이 가득한 여론에 치여 할 말을 못했던 CEO들이 익명으로 진행한 설문에서는 금융산업의 육성책에 대해 신랄하게 현실을 얘기한 것이다. 일부 CEO들 상당히 장문을 설문문항에 직접 기재하면서 한국 금융산업의 문제점을 직설적으로 지목했다.
CEO들은 강한 도전의식을 강조하면서도 수익 추구에 대한 부정적 여론, 이에 편승한 당국의 과도한 규제 등이 금융사의 혁신의지를 갉아먹지 않을까 우려를 드러냈다.
한 금융지주 회장은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려면 알 밖의 어미 닭도 동시에 알을 쪼아야 한다"면서 금융산업이 도약하려면 금융회사에만 일방적 희생과 노력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고해성사를 연상시키는 발언도 쏟아냈다. 모럴해저드로 고객 신뢰를 저버리고 이자수익에 안주해왔음을 인정하고 거듭나겠다고 약속했다.
CEO들은 무엇보다 금융산업이 성장하기 위해 시급히 개선할 점을 묻자 상세히 답했다. 평소 할 말이 많았다는 뜻인데 과반이 훨씬 넘는 73%가 '규제'를 지목했다.
금리·수수료 등에 대한 압박으로 수익 악화뿐만 아니라 시장 왜곡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규제가 수익 다각화를 막는 족쇄라는 쓴소리가 가득했다.
한 금융지주 회장은 "시행착오를 용인하지 않고 시류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복잡한 규제환경 때문에 금융사가 새 먹거리를 찾고 싶어도 도전하기 어렵다"며 "규제 방식을 열거식에서 네거티브로 전환해야 한다"고 적었다.
또 다른 회장은 "많은 외국의 금융사들도 한국의 규제가 지나치다는 의견을 피력한다"며 "사후적 규제로 초점을 옮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은행장은 "은행의 후진적 수익구조는 각종 서비스에 적정 수수료를 받지 못하는 금융환경에 기인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 꼬집었다.
'지배구조 안정화'와 '신규 수익원 확보'를 말한 응답자도 각각 18%를 차지했으며 제 살 깎아먹기식의 지나친 대출경쟁 지양, 단기성과 중심의 경영 형태 혁신 등의 답변도 나왔다.
가장 낙후된 분야에 대한 질문에는 CEO들의 목소리가 비슷했다. 획일화된 수익구조(54%), 글로벌사업(36%), 투자금융 부진(IB·36%) 등의 순이었다.
한 금융지주 회장은 "IB의 경우 기본적으로 자본시장이 낙후돼 있고 영업도 개인 대상 브로커리지나 펀드 판매 중심이라 문제"라고 지적했다. '경영진 리스크' '관계형 금융' '금융소비자 보호' 등의 답변도 눈에 띄었다.
반면 스마트금융(55%)과 가계대출 등 소매금융(36%)은 가장 앞서 있는 분야로 거론됐다.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을 묻자 '해외 진출'(64%)이 가장 많이 지목됐다. "동남아나 동유럽 중심으로 지분투자를 하거나 인수합병(M&A)을 통해 현지 적응력과 영향력을 높여야 한다" "국내를 벗어나 고성장·고금리 시장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등의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진심은 다음 항목에 드러나 있었다. 바로 '수수료 기반 비즈니스 집중(55%)'이었다. 저금리 시대에 이자수익은 한계에 달했고 이를 수수료로 보충해줘야 한다는 얘기다.
CEO들은 금융산업의 미래 모습에 대한 질문에 점포와 인력이 크게 줄고 금융거래는 비대면, 자산관리 등 상담업무는 대면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비슷한 그림을 그렸다.
다만 급격한 변화 여부에 대해서는 견해가 조금씩 달랐다. 한 은행장은 "국내 환경상 급격한 점포 축소와 인력 감축은 오히려 고객 불편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며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관측했다.
미래금융에 대한 질문에서는 은행 점포 전략에 대한 CEO들의 구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회장과 행장들은 새로운 거점점포의 모습에 대해 "백화점처럼 은행과 증권사·보험사가 한자리에 모여 고객이 필요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원포털점포'가 확산되고 지점 성격에 따라 영업시간이 주말이나 밤 등으로 유연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은행이 단순거래 처리에서 자산운용자문과 솔루션 제공 등 다양한 업무를 맡게 되고 이에 따른 전문인력 육성이 미래금융 적응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CEO들은 봤다.
한 금융지주 회장은 "IT 등 이종기업의 금융업 진출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사회공익을 핵심가치로 하는 사회적 은행이나 일본·북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는 토착화된 지역밀착형 은행의 등장도 기대된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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