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패러다임 시프트', 즉 생산, 기업경영, 정부 운영방식을 뜯어고치지 않으면 한 단계 도약이 어렵습니다."
현정택(64ㆍ사진) 국민경제자문위원회 부의장은 1일 서울 광화문 KT본사에 위치한 국민경제자문회의 집무실에서 진행한 서울경제신문 창간 53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창조경제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패러다임 시프트이고 소프트웨어"라며 이같이 말했다.
국민경제자문회의는 대통령 직속 경제자문기구로 박근혜 대통령이 의장이다. 현 부의장은 여론을 수렴해 정책대안을 올리는 '경제 브레인' 역할을 한다. 그만큼 그의 발언 하나하나는 우리 경제는 물론 대한민국 전반의 좌표를 바라보는 기준점도 된다.
현 부의장은 "최근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은 경기 탓도 있지만 선진국 진입을 막는 요소들이 구조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탓"이라며 의료와 교육 등에 '산업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앞으로 한국이 보다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다고 주문했다.
현 부의장은 패러다임 시프트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비교했다.
"천동설을 뒷받침하는 이론이 워낙 정교하고 탄탄해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한 후에도 50년간 그걸 믿는 사람은 열 손가락 안에 꼽혔다고 해요. 우리도 옛날 패러다임에 갇혀 있어서는 선진국 진입이 참 어렵습니다."
현 부의장은 우선 우리 경제의 현상황을 차분하게 진단했다. 그는 "(우리 경제상황에 비하면) 세계 경제는 오히려 좀 낫다"고 말문을 열었다.
"미국 정책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미국 실물경기가 회복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어요. 다음은 중국인데, 서방에서는 리스크를 강조하지만 나는 오히려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고 봅니다." 중국 덩치가 커진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는 "5년 전 중국이 10% 성장한 것과 지금 7.5% 성장한 것을 비교해보면 지금 7.5%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고 주장했다.
일본 아베노믹스에 대해서도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현 부의장은 "아베노믹스가 외교적으로는 문제가 크지만 경제학자 입장에서 경제정책으로 보면 장점이 많다"며 "외골수로 나서는 것이 아무 정책도 없는 것보다는 오히려 불확실성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바깥 경제의 사이클이 나아진 반면 안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다. 그가 볼 때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은 4%에 조금 못 미치는 3.8~3.9% 수준이다. 고성장을 달려온 국민들 입장에서 볼 때는 성에 차지 않는 숫자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일 때 아일랜드의 5% 성장에 대해 박사들과 논의한 적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아일랜드는) 그리스와 같은 꼴이 됐습니다. 지금 한국 경제의 수준과 인구구조ㆍ성숙도 등을 감안해도 4%를 넘기는 건 조금 무리예요."
2ㆍ4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기 대비 1.1%을 기록했다. 그는 "1.1%는 수치상 그렇게 나쁜 게 아닐지 몰라도 삼성전자 등 주요 기업을 빼면 99% 기업은 실적이 좋지 않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실적으로 대부분 기업의 수익성이 떨어지는데 전망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경제정책 평가 부분과 관련해 현 부의장은 지난 정권 막바지의 정책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시했다. 보다 과감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거시정책이 지나치게 신중했다는 느낌입니다. 정권 말 균형재정에 집착하고 연말정산을 미리 해주는 정치적 과정이 올해까지 이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현 부의장은 지금 상황에서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는 단연코 '경제활성화'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선순위는 100번 경제활성화예요. 세수확대는 적어도 올해에는 안 맞아요. 구조적으로 낮아진 잠재성장률을 높이면 나머지 문제도 해결됩니다."
하지만 경제민주화가 경제활성화와 상충하는 개념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갔다. 그는 "경제민주화는 거창한 게 아니다"라며 "기업은 지분만큼만 권한을 가지라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룰'을 바로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성장과 배치되지 않는 경제민주화란 무엇일까. 현 부의장은 이 대목에서 정치권 등의 마구잡이식 경제민주화 바람에 우려를 표시했다.
"우리나라 기업지배구조 등을 잘 아는 사람이 정교하게 디자인해 장기적으로 밀고 나가야 해법이 됩니다. 최근 정치권이 앞다퉈 입법으로 경제민주화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는 플러스보다 마이너스 효과가 훨씬 커요. 법을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지요."
성장을 위한 해법도 제시했다. "경제학자가 볼 때 답이 뻔히 나와 있어요. 의료ㆍ교육과 최근에 규제를 푼 관광 등 지식서비스 산업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은 문제다. 현 부의장은 "교육은 교육이 백년대계라는 논리, 의료는 국민건강을 책임진다는 논리를 앞세우지만 교육ㆍ의료를 산업으로 접근해야 앞으로 한국이 벌어먹을 게 많다"고 강조했다.
"지금 한국의 의료관광은 태국에조차 밀리고 중국 학생 유치는 싱가포르에 다 내주고 있어요. 전통 제조업의 상품수출이 한계에 이른 만큼 우수한 브레인들을 산업에 활용하는 전략이 절실합니다."
그는 "태국의 의료관광객이 1년에 180만명이나 되는데 우리는 아직도 호텔 짓는 사람이 병원을 짓고 의사를 고용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제일 머리 좋은 학생들이 의대를 가는데 10년째 안 풀리는 문제"라고 안타까워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그는 "학교와 전교조가 심하게 대립하지만 지금 같은 상태가 깨지는 것은 양쪽 다 철저하게 싫어한다"며 "미국이 상위 1%, 싱가포르가 상위 2~3%를 흡수하는 등 중국ㆍ베트남 교육시장의 수요가 많지만 우리는 입시제도나 특혜시비ㆍ정원제한 등으로 다 막아놓고 이걸 싱가포르에 다 내주고 있다"고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필요성은 공감되지만 문제는 국회에 갈 때마다 번번이 막히는 현실이다. '해법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10초 가까이 침묵했다. 그리고 명쾌하게 답했다.
"만들어야 해요. 송도면 송도, 제주도면 제주도에 하나라도 해서 보여줘야 합니다. 시범적으로 보여줘 편익을 설득해야 하는데 이걸 아는 저쪽에서는 하나라도 만드는 걸 더 반대하지 않겠어요?"
정책을 움직이는 관료들의 창의성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고 물어봤다. 그는 "1970년대와 비교해 민간의 역할이 커진 영향도 있을 것"이라며 "다만 관료나 사회적 시선이 공무원을 '안전한 방편'으로 보는 것은 정말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창의적인 일에 도전해야 할 젊은이들이 신분보장만 따져 직업을 선택하다 보니 '정부는 안주하는 곳'이라는 편견이 깊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기업 투자가 위축된 것도 3세 경영인들의 도전의식이 약해진 탓이라는 지적에 그는 "글로벌 기업이 아니었던 1세대, 1세에게 물려받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2세 기업인들과 달리 3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글로벌 경쟁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잭 웰치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의 '핏줄이 좋다 나쁘다는 얘기하지 않는다. 확률적으로 볼 때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풀이 넓어야 한다'는 말이 맞는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현정권이 유일하게 수치로 목표를 제시한 고용률 70%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냐는 질문에 현 부의장은 "우선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체감 가능한 목표를 세운 것은 상당한 평가를 해줘야 한다"고 확인했다. 그러면서 "남성 고용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이상이지만 여성은 일본 다음으로 꼴찌"라며 "여성 고용률을 높이면 70%를 채울 수 있다"고 말했다. "OCED는 청년고용률을 15세부터 따지는데 우리는 15세부터 대학공부에 몰두하고 군대도 가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청년고용률은 교육과도 연결된 문제입니다."
우려되는 흐름도 있다고 했다. "목표수치를 채우려고 공무원을 족치고 부처 간에 경쟁을 시키면 절대 안 됩니다. 실적경쟁이 자칫 취지와 동떨어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어요."
창조경제로 주제를 틀었다. 현 부의장은 "창조경제는 IT벤처, 융합, 패러다임 시프트 등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며 한국의 구조적 변화, 즉 패러다임 시프트를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는 정권을 떠나 우리나라의 도약이 달린 문제라고 했다.
"한때 우리나라의 OECD 가입을 '부자클럽'에 들어간 것이라며 경축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하지만 1997년 OECD 대표부에 경제공사로 파견돼 가보니 OECD 헌장에는 '부자'라는 단어가 없더군요. 대신 ▦다원적 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존중 등 세 가지 가치를 추구하는 나라의 모임이라는 문구가 있었어요.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이 세 가지를 충족하는가? 15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아마 처질 것으로 봅니다."
현 부의장은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정부를 운영하는 시스템, 기업지배구조, 기업 간 룰, 신뢰나 투명성 같은 사회적 자본이 개념도 어렵지만 매우 중요하다"며 "사회를 움직여가는 소프트웨어가 한국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과제"라고 매듭을 지었다.
■ 약력 |
현장경험 풍부한 국제경제 전문가… 역대정부 두루 중용 ■ 현정택 부의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