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옛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간 합병은 대한민국 금융산업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국민·장기신용은행 간 합병에 이은 2차 인수합병(M&A)은 메가뱅크의 탄생을 알림과 동시에 국내 은행이 적어도 덩치만 놓고 본다면 글로벌 무대로 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작고한 김정태 통합 국민은행장은 당시 서울경제신문 기자와 만나 "세계 67위 은행을 몇년 안에 반드시 50위권으로 올려놓겠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강정원 전 행장 때 국민은행은 최대 2조7,000억여원의 순익을 냈다. 그만큼 국민은행은 신한·하나 등 후발은행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리딩뱅크'였고 세계 은행 순위에서도 국내에서는 국민이 첫째였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잘못된 지배구조는 비극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고 리딩뱅크 자리는 한순간에 후발은행들에 빼앗기고 말았다.
비극은 2007년 강 전 행장이 연임한 후 시작됐다. 은행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졌다.
강 전 행장은 지주회장이 되려는 욕심에 정치권에 줄을 대고 노동조합과 주고받기를 했다. 내부적으로는 외부에 청탁하는 사람이 임원이 되고 승진가도를 달렸다.
여기에 고질적인 국민과 주택 출신 간 채널 싸움이 더해지면서 은행은 무너져갔다.
제대로 된 줄을 타지 못한 이들은 개인 치부에 신경을 쓰거나 외부로 돌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와 올해 들어 국민은행에서 횡령 같은 사고가 터지는 것은 바로 비틀어진 지배구조와 이들이 뿌린 독버섯 아래에서 기생한 왜곡된 줄서기 문화 때문이라는 게 은행 안팎의 시각이다.
내부에서 앞길이 보이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한탕을 노리게 된다는 말이다.
직원들은 이미 국민은행을 '이류·삼류 은행'이라고 보고 있다. 신한과의 차이는 이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됐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채널 다툼과 낙하산 인사에 조직문화는 무너졌다는 데 은행 관계자들도 동의한다.
금융계에서는 이번 1조원에 가까운 터무니없는 허위 입금증 발급도 단순히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 수준의 개인적 사건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비리 사건도 회사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봐가면서 일어나기 마련인데 국민은행은 윗선에서 대대적 혁신을 주문하던 시점에도 내부 직원들 사이에는 위기감이 거의 없었던 것이 정말 문제"라고 말했다. 회장이나 행장이 지시하는 것이 일선에서는 '별나라 얘기'로 치부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국민은행의 이 같은 총체적 난국은 결국 주인의식을 잃어버린 채 느슨해진 조직문화를 아직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금융권의 공통된 시각이다.
실제 국민은행은 지주회사인 KB금융지주의 최고 경영자가 3년마다 바뀌면서 조직이 통째로 흔들렸고 그 과정에서 고위급들 사이에서는 승진을 위한 줄대기 문화만 만연해 내부 임직원들을 다잡을 통제의 끈을 놓쳐버렸다.
황영기ㆍ 어윤대 등 정치권에서 온 낙하산 수장들이 잇따라 취임하고 그들이 전임 수장의 그림자를 지우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내부 임직원들은 각자 자기 살길을 찾게 되고, 비리 유혹과 실적 욕심에 쉽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은행 안의 뿌리깊은 채널(국민ㆍ주택 은행 간)갈등 역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민은행은 노조만 3개다. 국내 시중은행 가운데 가장 많은 규모를 자랑(?)한다. 직원들의 이해 관계가 다양하다 보니 생긴 진풍경이다.
국민은행은 물론 국민주택채권 원리금 횡령, 도쿄지점장의 부당 대출, 고객정보 유출 사고 등과 달리, 허위 발급증 사건의 경우에는 내부 고발을 통해 걸러졌고 실제 피해자가 드러나지 않은 만큼 지금까지의 비리 사건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내부 고발 시스템이 강화됐다는 반증 아니겠냐는 것이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쳐도 은행권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임의양식까지 만들어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지급하는 비리가 국민은행 같은 거대한 조직에서 벌어졌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금융계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번 사건 내부 제보가 만일 2채널(국민·주택) 간의 갈등 속에서 불거졌다면 그 역시 정상적인 내부통제 시스템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국민은행 입장에서는 이번 사건이 임 회장과 이건호 행장이 취임 이후 돌파구로 내새웠던 스토리금융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더 뼈아플 것으로 보인다. 국민은행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스토리금융은 고객과의 접점인 은행 지점에서 고객의 신뢰를 회복해 소매금융의 강자이자 리딩뱅크로서 다시 우뚝 서겠다는 내용을 뼈대로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은행 지점 현장에서 고객의 신뢰를 우롱하는 행위가 또 다시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그동안의 사고로 국민은행이 내놓은 '속죄서 상품'도 빛이 바라게 됐다. 국민은행은 지난 2월 5년제 혼합형 주택담보대출 평균 금리를 3.58~3.6%까지 내렸다. 두 차례에 걸쳐 종전보다 무려 1.32%포인트 인하한 것으로, 3년제 평균 금리(3.78~3.8%)대비 0.2%포인트 싼 것이다. 통상 5년제 대출의 조달비용이 더 많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금리가 3년제보다 더 싸고, 심지어 시장 금리를 월마다 반영하는 변동금리 상품의 대출금리보다 더 낮게 책정됐다. 국민은행이 예대마진 축소를 무릅쓰고 이 같은 파격적 금리 상품을 내놓은 것은 당국의 고정금리 대출 확대 방침에 부응하는 한편 최근 잇따른 사고로 인한 이미지 추락 문제를 쇄신하기 위한 차원이었다고 은행 내부 관계자들은 말한다. 끊임없는 사고에 휘말려 허우적대던 국민은행이 금융당국과 고객들에게 일종의 '속죄성 상품'을 내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고로 이런 취지는 퇴색되고 말았다.
한 시중은행 고위 임원은 "1,200개 지점을 보유한 국민은행은 어떤 은행보다도 조직 통제가 중요한 곳"이라며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국민은행에서 가장 기본적인 윤리 문제가 끊이질 않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이 검찰 수사과정에서 개인 비리로 일단락 될 수도 있지만 2차 피해 등 추가적인 비위사실이 적발될 경우 금융권에 다시 회오리가 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태가 커지면 지난해부터 국민은행 사건을 지켜봤던 감동당국도 책임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금융계 고위 관계자는 "임영록 회장이나 이건호 행장 스타일이 너무 점잖다 보니 (조직 혁신)을 제대로 밀어붙이질 못하는 것 같다"며 "결국 조직 장악력의 문제"라고 촌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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