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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ㆍ26에 묻힌 ‘행정수도 건설’

`탈 서울 행정수도 건설` 계획을 세운 건 현 `참여정부`만은 아니다. 박정희 정권시절에도 150여명의 국내외 전문인력이 투입, 2년 여의 연구 끝에 행정수도 건설계획을 추진한 바 있던 것. 케이블과 위성을 통해 방송되는 히스토리채널은 6일과 13일 70년대 추진됐던 행정수도 건설계획을 다룬 `백지가 되고 만 백지계획`(밤 12시ㆍ사진)을 2부작으로 방송한다. 행정수도 건설이 처음 언급된 것은 지난 77년. 당시 서울 인구는 750만명을 넘어섰고 매년 20~30만명의 인구가 서울로 모여들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대학, 공장 건설을 불허하고 그린벨트를 설치하는 등 인구집중을 막기 위해 애썼으나 효과를 얻진 못했다. 하지만 박정권의 수도 이전 계획은 인구분산 및 균형발전의 목적보다는 안보적 이유가 컸다. `냉전 시대`에 수도 서울과 휴전선의 거리가 불과 50㎞ 내외인 점이 가장 큰 고려 사유가 됐다는 설명이다. 행정수도 건설 추진단은 휴전선에서 70㎞이상 떨어진 거리의 국토 중심부, 인구 50만명 내지 100만명 규모 등의 기본원칙을 정하고 약 15년에 걸쳐 행정수도를 완성할 계획을 세워갔다. 이들은 민심 동요와 부동산 투기 등의 부작용을 염려, 철저한 보안 속에 천안, 장기, 논산 등 세 지역을 택했고 이중 조치원에서 공주시에 걸친 장기 지역을 최종 후보지로 낙점했다. 70년대 행정수도 건설계획은 초고속철도와 지하철 건설, 보행자 우선의 녹지형 도시화 등 세밀한 부분까지 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새 행정수도 장기에 올림픽을 유치하고 이를 위해 경기장과 선수촌을 포함한 올림픽지구를 만든다는 사항까지 포함됐을 정도다. 당시 제2경제수석이자 중화학공업 추진위원회 기획단장으로 추진단을 지휘했던 오원철씨는 “(행정수도건은) 부총리 서명까지 난 상태로 총리 서명과 국무회의 공식통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며 “행정수도를 위한 토지법까지 제정됐던 상태”라고 회고했다. 박 대통령도 몹시 흡족해 했다는 이 안이 백지화된 것은 다름아닌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10.26 사건이 발생하며 계획을 맡았던 중화학공업 기획단도 해체된 것. 이후 정권들은 행정수도 건설 및 국토재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보고서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김희원기자 heewk@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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