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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쓰는 법이야기] <12> 흉한 사진이 흑백이었으면…

선혈낭자한 컬러사진 볼때마다 섬뜩… 사건 진실 밝히려면 피할수도 없어

강태훈 서울중앙지법

요즘에도 흑백사진이 상당수 애호가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사진용어 중 계조(階調)라는 것이 있다. 이는 사진 화상에서 밝은 부분부터 어두운 부분까지 변화해 가는 농도의 단계를 뜻한다. 사진에 그런 단계가 잘 나타나 있으면 계조가 풍부하다고 말한다. 아직까지는 디지털 사진보다 필름 사진이, 특히 잘 찍은 흑백필름으로 인화한 사진의 계조가 풍부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디지털 시대에도 흑백사진이 사진 애호가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컬러사진보다 흑백사진이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내가 ‘사진 애호가’라서는 아니다. 형사사건 수사기록에 편철돼 있는 선혈낭자한 사진을 볼 때마다 가지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생각이다. 요즘에는 사진을 A4 용지 자체에 곧바로 인화해 기록에 철을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화지에 인화한 사진을 테이프를 이용해 붙여 놓았었다. 그래서 기록을 뒤적일 때마다 사진이 부착된 페이지가 자동적으로 펼쳐지고, 그 흉악하고 생생한 사진을 몇 번씩 반복하여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흑백사진이면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하지만 사진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흉한 사진이라고 해도 판사가 이를 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애꿎게 목숨을 잃은 피해자를 생각하면 그런 사진일수록 더욱 꼼꼼히 살펴야 한다. 몇 해 전 형사사건을 담당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판사가 임신한 상태임에도 별로 아름답지 않은 사진들을 매일같이 보고 있는 것이 안쓰러웠다. 태교에 좋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해줬더니 여장부 기질이 다분한 그녀는 이전에 더한 일도 있었기 때문에 사진 정도는 충분히 견딜만 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여판사는 이른바 ‘토막살인 사건’의 주심을 담당했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수사기록을 보다 보니 기록 중간 부분에 검은 비닐이 단정하게 접혀진 상태로 부착돼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의아한 생각이 들어 그 비닐을 몇 번씩이나 이리 저리 펼쳐보았으나 별로 특별한 것이 없는 그저 평범한 비닐봉투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봉투가 붙어 있던 A4 용지의 한 귀퉁이에 아주 작은 글씨로 ‘시신의 일부가 들어 있던 비닐봉투’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게 됐다. 갑자기 손에 무언가 묻어있는 것 같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고 그 느낌은 아무리 손을 씻어도 가시지 않고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 여판사의 이야기를 대학 교수인 친구에게 했더니 그 친구는 “‘가운’을 입는 직업이 보기에는 그럴듯해도 실제로는 전혀 고상하지 못하다”는 말을 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운을 입는 대표적인 직업으로 신부ㆍ의사ㆍ판사가 있는데 신부는 상처받은 영혼을, 의사는 손상된 신체를, 판사는 범죄와 같은 사회병리나 사람들 간의 갈등을 다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래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정신적 혹은 육체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이나 갈등을 겪는 사람들이 그들의 상처나 갈등을 치유하고 위로를 받지 않느냐. 가운을 입는 직업은 그런 사람들을 보듬어주는 매우 품위있는 직업이다”고 반박했다. 오늘도 재판을 하기 위해 법복을 입고 기록을 넘긴다. 거울을 보면서 과연 내 자신이 내가 말한 그런 품위를 갖추고 있는지 자문한다. ■ 이글은 본지 홈페이지(hankooki.com)뿐만 아니라 서울중앙지방법원 홈페이지(seoul.scourt.go.kr) ‘법원칼럼’을 통해서도 언제든지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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