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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리즘의 명암] 3. 개방 10년 남미경제
입력1999-06-16 00:00:00
수정
1999.06.16 00:00:00
부에노스 아이레스=김인영 특파원 INKIM@SED.CO.KR붉은 벽돌로 된 대통령궁 2층 베란다에 마이크를 잡고 그녀는 플라사 데 마요 광장에 모인 노동자들에게 단결을 호소했다. 그의 옆에는 후안 페론 대통령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노동자의 나라를 건설할 것임을 다짐했다. 미국 헐리웃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한 에비타(에바 페론의 애칭)의 향취는 부에노스 아에레스 곳곳에 배어 있다.
레콜레타 공원묘지, 대통령궁, 플라사 데 마요 광장을 들르는 시민들은 죽은지 25년이 지났지만 에비타(에바 페론의 애칭)에 대한 칭송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수도를 가로지르는 대로에는 어린아이를 업은 어머니는 차 숲을 누비며 구걸을 했다. 교통체증으로 밀려 있는 도심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삶의 공간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에비타와 페론주의의 존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페론주의자들의 지지로 89년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페론주의를 버렸다. 트럭 운전수 출신의 메넴은 철저한 페론신봉자였지만, 페론주의의 문제점도 잘 알고 있었다. 메넴의 페론당은 노동자 정책을 대폭 정리하고, 자유시장 혁명을 도입했다. 그러나 그 향기는 마냥 향기로운 것만 아니다. 안정된 직장을 보장받던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실업자가 되어야 했고, 미국의 대형 자본은 영세한 현지 기업을 파괴해 나갔다. 새로운 이론으로 무장한 페론주의자들은 그들의 지지기반이 국제자본에 의해 파괴되고 있음을 방관하고 있었다.
근로자들은 『메넴 정권이 미국이 주도하는 제1세계에 붙어 아르헨티나를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위기가 한창이던 97년엔 성장율 8%를 달성했지만, 실업율은 14%에 이르렀다. 방대한 실업군이 시장 혁명의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참조
과거에 임금 인상을 주장하던 노조는 이제 일자리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난 해엔 분노한 농민, 근로자, 실업자들이 전국 21곳에서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먹을 것을 달라며 며칠 동안 시위를 벌였다. 카톨릭 성직자들이 중재에 나서 정부와 시위대가 1인당 월 200 페소(달러)의 최저 임금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시위는 간신히 수습되기도 했다.
글로벌리즘은 선진국 자본, 특히 뉴욕 월가의 국제금융시장 지배 이데올로기며, 철저한 투자자들의 논리다. 글로벌리즘에서 근로자는 자본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어야 할 존재다.
브라질의 경우도 글로벌리즘은 가난한 자들에겐 고통스러운 존재다.
브라질의 독특한 문제는 무토지 빈민의 확산이다. 상파울루·리우데자네이루등 대도시 주변 빈 땅에는 가진 것이라곤 몸뚱아리 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밀려와 천막을 치며 살고 있다. 토지 주인들은 한번도 경작하지 않으면서 땅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갱들을 시켜 점거 빈민들을 쫓아내고 있다. 빈민들은 동물들도 땅에 살 권리가 있는데,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땅에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것은 생존권 박탈이라며 투쟁을 벌이고 있다.
공장에서 쫓겨난 무토지 빈민들은 수백만명으로 불어나고 있고, 글로벌리즘을 수용한 레알 개혁으로 급증하는 추세다. 전국에 300곳, 138만 에이커에 이르는 땅들이 이들 빈민에 의해 점거당해 천막촌화하고 있다. 상파울루 주변 실업율이 90년 10%에서 현재 20%로 늘어났는데, 이들은 도시 외곽의 빈땅에 살며 브라질 경제에 방대한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한때 사회주의에 함몰했던 남미의 지도자들은 시장 혁명을 단행하면서 경제에 안정을 가져왔을지 모르지만, 개방과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양산하고, 빈부 격차만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페론주의는 아르헨티나 경제 전반에 심각한 고질병을 남겨 놓았다. 노조는 근로자들에게 직장을 철밥그릇처럼 보장해주었지만, 직장내에는 활기가 없었다. 적당히 일해도 봉급을 받을텐데,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는 사회였다. 산업은 정부의 철저한 보호 속에서 생산성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선진국과 경쟁하려면 생산설비를 현대화하고 합리화해야 하는데, 노조가 반대해서 설비 개선을 할 수 없었다. 내수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무역장벽을 쌓았기 때문에 국내 생산물자는 터무니없이 비쌌고, 경쟁력을 상실했다. 전화가 제대로 걸리지 않았고, 우편물이 전달되지 않는 게 다반사였다. 수천%에 이르는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오늘의 환율이 얼마인가를 챙겼다. 달러가 가장 안전한 도피처였고, 페소는 쓰레기처럼 취급당했다.
82년 포클랜드에서 패전한 아르헨티나는 군부 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경제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라울 알폰신 대통령은 89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함으로써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전쟁 패배에 이어 국제자본시장에 의한 또다른 굴욕적 패배를 안겨 주었다.
페론당 후보였던 메넴이 위기 해결책으로 내세운 정책은 노동구조 탄력성 확보와 국영기업체의 매각이었다. 새로 입법된 노동법은 기업주가 경영상태가 나쁠 때 노조의 동의없이도 근로자를 감축할 수 있고, 임금을 삭감할 수 있도록 했다. 적자에 허덕이던 근로자 연금과 사회보장제도를 대폭 줄이고, 학교와 병원 운영권을 지방으로 이양했다.
아르헨티나의 시장 혁명은 서서히 효과를 보고 있다. 94년 20%에 이르렀던 실업율이 98년에 15% 아래로 떨어졌다.
국영석유회사인 YPF는 82년과 90년 사이에 60억 달러의 적자를 냈었지만, 민영화된 다음해인 96년에 9억 달러의 흑자를 냈다. 그러나 국영기업이었을 때 5,000명이던 직원은 지금 500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4,500명의 일자리가 신규창출될 때까지 아르헨티나의 시장 혁명은 성공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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