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뉴엘 사건에서 은행의 수출서류 심사에 미비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수출 시장의 생리상 해외 대형 유통업체와 같은 힘 있는 수입자들은 국내 수출업체들에 완전히 갑의 지위에 있기 때문에 촘촘하게 서류를 받아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결국 은행원 입장에서 보면 서류 자체를 근본적으로 보완하기 힘들고, 사고는 어디에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상황인데 무역보험공사 수출보험만 믿고 수출업체들에 적극적으로 돈을 내주려 하겠습니까?" (B은행 여신담당 부행장)
국내 수출의 주요 동력인 '수출금융'이 올해 들어 은행·무역보험공사·산업통상자원부 등 각 주체들의 '보신주의'에 가로막혀 제대로 굴러가지를 않고 있다. 지난해 모뉴엘 사건에 이어 최근 후론티어의 대규모 사기수출 사건까지 터지자 수출 중소기업을 바라보는 금융권의 시선은 싸늘해질 대로 싸늘해진 상황이다.
여기에 모뉴엘 사건과 관련, 무보와 은행이 보험금 지급 여부를 놓고 소송까지 이어지는 진흙탕 분쟁을 벌이면서 수출금융 주체들 간 불신이 어느 때보다 팽배하다. 수출정책을 책임지는 산업부나 중소기업 금융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금융위원회는 이 상황을 팔짱만 끼고 바라보고 있다. 수출실적이 유례없이 고꾸라지며 경제성장률이 뚝뚝 떨어지는 실정인데 망가지는 수출금융 시스템을 어느 곳도 나서서 수습하고 있지 않다.
실제 수출금융 업무를 가장 활발히 하던 A은행의 경우 지난 1~5월 단기수출보험(EFF)을 통한 수출채권 유동화 실적은 3억8,50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실적(14억4,400만달러)에 비해 무려 70% 이상 감소했다. 이 은행이 EFF를 기반으로 올해 수출기업에 새로 한도를 부여한 실적은 총 3건에 1,000만달러로 지난해(48건, 1억2,100만달러)의 10분의1에도 못 미친다. 은행이 수출기업들의 수출채권을 적극적으로 매입하지 않고 신규고객 발굴에도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중소기업 지원에 가장 적극적인 B은행도 5월까지 EFF, 수출신용보증서(선적후), 수출신용보증(네고) 등 모든 수출금융 수단을 통해 수출채권을 매입한 실적이 3억9,100만달러 수준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5억9,600만달러)보다 30% 이상 감소했다. B은행의 한 고위관계자는 "본점 차원에서는 수출 중소기업 지원을 계속 늘려야 한다고 독려하고 있지만 막상 영업점 직원들은 함부로 취급했다가 사기를 맞고 보험금도 받지 못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며 꺼리는 분위기가 역력하다"고 말했다.
수출금융이 망가지면 상당수 국내 기업들의 수출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수출기업은 물품을 수출한 후 수출대금이 들어오기 전 수출채권을 은행에 매각해 먼저 대금을 지급 받고 이를 바로 다시 공정에 투입해야 수출실적을 늘릴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은행이 수입자로부터 대금을 받지 못할 리스크를 헤지하는 수단이 바로 수출보험이나 수출보증이다. 은행이 수출채권을 빠르게 유동화해주지 않으면 수출기업의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시중은행의 한 수출금융 담당자는 "엔저 여파로 전체적으로 수출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수출금융 실적이 동반 추락한 측면이 있다고 해도 일부 은행의 실적은 너무 과도할 정도로 감소한 것이 사실"이라며 "모뉴엘 사기 사건과 무보와의 보험금 분쟁 이후 영업 현장의 지점장들이나 담당 은행원들이 일단 수출금융을 적극적으로 취급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고 전했다.
은행과 무보 등 수출금융 관계자들은 최근의 수출금융 부진이 결국 '징계 리스크'에서 비롯된 보신주의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모뉴엘 사건과 같이 세간의 주목을 끄는 수출 사기가 발생하면 무보는 감사원, 은행 직원들은 본점이나 금융감독원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무보가 모뉴엘 사건과 관련해 은행에 수백건의 보험금 지급을 모두 거부한 것도 다분히 감사원의 징계 리스크를 의식한 부분이 크다. 파헤쳐보니 은행 서류에 분명히 미비한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 보험금을 지급하면 담당 무보 직원이 향후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다.
은행원들 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는 무보의 수출보험을 사실상 정부의 보증으로 인식, 현장점검이나 서류심사를 촘촘히 하지 않고 수출채권을 활발히 매입해왔는데 앞으로는 보험금도 못 타고 징계도 받을 수 있다니 수출금융을 취급하기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엉성하기 그지없던 수출금융 시스템이 모뉴엘 사건으로 인해 민낯이 드러나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로 바뀌면서 그 누구도 수출금융 활성화에 적극 나서기가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꼬인 매듭을 풀어줘야 할 산업부 등 정부 유관기관들은 마땅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관섭 산업부 1차관은 올해 초 모뉴엘 사건에서 비롯된 무보와 은행의 분쟁과 관련해 "무보와 은행이 공동으로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결과적으로 은행이 모든 책임을 지게 됐고 무보와 은행의 분쟁은 결국 장기 소송전으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최근 중소기업 후론티어가 위장수출을 통해 금융기관들로부터 1,500억원대의 무역금융을 부당 대출 받아오다 적발되자 금융권의 분위기가 더욱 경직되고 있다.
시중은행의 한 부행장은 "수출금융이 부실해진 것은 정부가 수출목표 달성을 위해 수출금융을 수출장려책으로 동원하면서 너무 급속히 규모를 키운 책임도 크다"며 "은행과 무보가 서로 신뢰를 되찾고 합심해 수출기업 지원에 나설 수 있도록 보다 정부 차원에서 전향적인 중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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