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시장의 ‘빅뱅’을 몰고 올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이하 자통법)이 국회에 상정된 채 수개월째 표류하고 있다. 자통법을 둘러싸고 증권사의 지급결제 허용 문제에 대해 은행권이 강력반발하면서 정작 금융시장 전반의 일대 혁명을 야기할 자통법의 취지 자체가 무색해질 상황에 처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자통법 도입은 일부 업계나 이해 관계자들의 ‘밥그릇 싸움’ 차원에서 벗어나 금융서비스를 직접 이용하는 금융소비자들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금융 선진국’ 갈 길 먼 한국=#사례1. 수년째 5% 언저리에 머문 적금금리에 질린 김부자씨. 올 초 그는 “지난해에 대박 난 펀드니 일단 가입하시라”는 은행 여직원의 권유에 못 이겨 OO펀드에 가입했다. 그러나 펀드투자 경험이 일천했던 김씨는 투자대상이나 보수ㆍ해지수수료에 대한 얘기는 무엇하나 제대로 듣지 못했다. 몇 개월 뒤 펀드수익률이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쳤다는 소식을 접한 김씨는 부랴부랴 창구를 찾아 해약(환매)을 요구했다가 환매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설명을 접하게 됐다.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따져봐도 “설명을 충분히 들었다는 서명까지 해놓고 이제 와 딴소리냐”는 핀잔만 들어야 했다. #사례2. 경북 청도에서 3,000여평 규모의 사과농사를 짓는 박농사씨. 그는 매년 초봄이면 늦서리와 이상저온으로 인한 과수피해에 노심초사해왔다. 한창 꽂이 피고 수정이 돼야 할 시기에 서리가 내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다. ‘서리보험’ 같은 상품이라도 있다면 가입해 피해를 줄일 수 있겠지만 아직 국내에는 이 같은 상품이 출시된 게 없다. “미국 농가들 사이에서는 일기 변화로 인한 손해를 피할 수 있는 ‘날씨파생상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는 소식에 그저 부러움을 금치 못할 뿐이다. #사례3. 이투자씨는 최근 월급통장 여윳돈을 굴려볼 요량으로 하루만 맡겨도 4%대 이자가 나온다는 증권사 자산관리계좌(CMA)에 가입했다. 그러나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아 이씨는 불편함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우선 오후10시만 지나면 자동화기기(ATM)에서 송금은커녕 현금인출도 불가능했다. 인터넷뱅킹도 은행과 달리 오후10시부터 다음날 오전6시까지는 ‘이용불가’란 메시지만 떴다. 계좌이체를 할 때는 동일은행 사이에서조차 수수료를 내야 했다. 게다가 이씨가 쓰는 △△카드와 XX통신 핸드폰 결제대금은 CMA를 통한 자동이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참다 못한 이씨는 결국 은행 월급통장을 되살릴 수밖에 없었다. ◇자통법, “금융소비자가 편해진다”=현재 국회에 계류된 자통법은 ▦포괄주의(negative system)체제 도입 ▦금융투자업간 겸영 허용 ▦투자자보호 강화를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최도성 증권연구원 원장은 “이 같은 제도들의 목적은 결국 투자자가 보다 편리하게 자본시장과 관련된 거래를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우선 잘못된 펀드판매로 어려움을 겪은 김씨의 경우를 보자. 현행 법률로는 김씨가 손해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지만 자통법에 담긴 ‘투자상품 설명의무’(Product Guidance) 강화방침이 적용되면 배상책임은 은행이나 증권사 등 판매창구의 몫으로 넘어간다. 김씨가 설명을 요구했는지, 또 ‘투자설명을 잘 들었다’는 항목에 서명을 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실질적으로 김씨가 만족할 만한 설명이 제공되지 않으면 손해책임은 판매사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물론 충분한 설명을 제공했다는 점을 입증하는 책임도 금융회사 몫이다. 서리피해를 걱정하는 박씨는 장외파생상품 등의 기초자산 규제의 폐지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현재는 증권ㆍ통화ㆍ금리 등에 대해서만 위험해소를 목적으로 한 파생상품 출시가 가능하지만 자통법에서는 이 같은 규제가 대폭 완화된다. 이에 따라 날씨는 물론 재해ㆍ범죄발생 등에 대비한 다양한 금융상품의 출시가 가능해진다. 실제로 미국 시카고 상업거래소(CME) 등에서는 기후 파생상품이 거래된 이후 연간 600만여건의 관련상품이 큰 인기를 끌며 판매되고 있다. 증권사 CMA를 이용하는 이씨도 불편을 해소할 수 있다. 그간 증권사 CMA는 은행과 제휴를 맺어 가상계좌를 만든 뒤 고객예탁금의 지급결제를 해야 했지만 증권사 지급결제 기능이 허용되면 수수료 부담도 줄고 증권사 계좌를 은행계좌 수준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증권사들도 은행에 내고 있는 연간 140억원대의 제휴 수수료도 사라지면서 고객편의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다. ◇금융시장 발전과 경쟁력 확보 먼저 생각해야=전문가들은 금융산업 경쟁력을 평가하는 핵심척도는 바로 “소비자들이 얼마나 쉽고, 편리하게 또 안전하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보면 자통법 역시 금융소비자들의 편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본래 취지가 강조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병연 건국대 법대교수는 “자통법이 규정하고 있는 증권업ㆍ자산운용업 등의 겸영 허용이나 금융기관이 취급하는 상품에 대해 포괄주의를 채택한 점 등은 궁극적으로 소비자들이 다양한 금융상품을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며 “국회 법 통과 과정에서도 이 같은 점이 다시 한번 강조돼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골드만삭스 등 세계적인 수준의 투자은행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은행ㆍ증권사ㆍ보험 등 국내 금융업계간의 경쟁부터 활발히 촉진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전상경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어느 분야든 공정경쟁시스템이 마련되면 그로 인한 이익은 전부 소비자에게 돌아가게 된다”며 “합리적인 경쟁시스템이 마련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 지급결제 논란 등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정업계의 발전을 가로막은 규제들을 제거해 경쟁력을 높여주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한 다양한 상품이 함께 출시되고 경쟁하면서 서비스 수준이나 질도 높아질 것이란 얘기다. 전문가들은 특히 지난 86년 세계 최초로 자통법((Financial Services Act)을 제정한 후 런던거래소가 발 빠른 성장을 거듭, 전세계 기업공개(IPO) 실적에서 뉴욕거래소마저 능가한 점은 ‘경쟁이 곧 보약’이란 원칙이 입증된 사례라고 평가하고 있다. 증권계좌 지급결제기능 있으면 10명중 9명 "이용 편리해질것" ■ 증권투자자 100명에게 물어봤더니 증권 투자자들 10명 중 9명은 금융투자업과 자본시장에 관한 법률(자본시장통합법)에 지급결제 기능이 부여될 경우 증권계좌 이용이 편리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이처럼 지급결제 기능이 부여되기를 바라는 것은 현행 증권계좌로는 현금 입출금 등 금융생활이 크게 불편하기 때문이다. 18일 서울경제신문이 증권계좌를 갖고 있는 일반투자자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52명이 지급결제 기능이 부여될 경우 증권계좌 이용이 '매우 편리해질 것', 35명이 '어느 정도 편리해질 것'이라고 답해 대부분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별 차이 없을 것'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13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절대다수가 지급결제 기능 포함을 원하는 것은 현행 증권계좌 이용이 불편하기 때문으로 10명 중 6명(62%)이 평소 증권계좌를 이용하면서 불편한 점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은 현금 입출금이 어려운 점(32%, 중복응답)을 가장 불편한 사항으로 꼽았으며 이어 은행 이체시 수수료 부과(25%), 카드대금 등 계좌이체 불가(23%), 공과금 등 세금 납부 불가(21%) 등을 애로사항으로 제시했다. 이에 따라 지급결제 기능이 부여되면 가장 편리해질 것으로 자유로운 현금 입출금(37%)을 들었으며 카드대금 등 계좌이체(26%), 공과금 등 세금 납부(24%), 펀드 등 신상품 가입 편리(15%) 등도 꼽았다. 증권 투자자들은 또 자통법이 실시돼 증권계좌에 소액 지급결제 기능이 부여될 경우 '은행에 예치한 자금을 증권계좌로 옮기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절반이 넘는 53명이 '생각해 보겠다'로 답해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는 소액지급 결제문제에 대한 정보 부족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 39명은 '옮기겠다'고 대답했으며 8명은 '옮기지 않겠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은행자금을 증권계좌로 옮기려는 사람들 중 85%는 '이자가 싼 보통예금에 넣어둘 필요가 없기 때문'을 이유로 들었고 나머지 15%는 '펀드와 파생상품 등 다양한 신상품에 가입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또 증권계좌로 옮기려는 사람의 64%가 주식 등 증권 관련 상품에 대한 투자 비중을 늘릴 계획이라고 밝혀 자본시장통합법 통과시 증시의 저변 확대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증권계좌로 옮기지 않겠다고 답한 사람들은 '현재 증권계좌를 이용하는 데 큰 불편이 없기 때문'을 가장 큰 이유로 제시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