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물 등은 정부가 개방에 대비, 각종 지원책을 약속하면서 법률시장은 알아서 하라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지난 11일 저녁 서울시내 한 호텔에 모인 국내 10대 로펌 대표변호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쏟아낸 말이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건 업계 역사상 처음이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얘기다. 발등에 불로 떨어진 시장개방에 대한 대책 및 의견 교환을 위해 모였지만 뾰족한 해법은 없었다.
이르면 오는 2008년부터 국내 법률시장의 빗장이 풀린다. 5년간 단계적 개방 이후 2013년쯤에는 외국 로펌이 국내 변호사를 고용하고 로펌과 동업할 수 있는 등 완전개방 체제로 들어선다. 이날 로펌 대표들은 업계 대책을 위해 모였지만 개방에 대비해 로펌간 먹고 먹히는 치열한 생존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다. 수천명의 변호사로 경험과 네트워크를 갖춘 외국 로펌과 경쟁하기 위해선 대형화가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반면 수요자는 안방에서 국내 로펌뿐 아니라 해외 유수 로펌을 쉽게 만날 수 있게 되면서 질 좋은 서비스를 누릴 수 있을 전망이다.
◇개방 수혜자는 개인 아닌 ‘기업’=법률시장 개방의 긍정적 효과는 쇠고기나 자동차처럼 일반 소비자들에게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인수합병(M&A)ㆍ국제거래ㆍ국제금융 분야 등에서 법률 자문이 필요한 외국인투자가, 국내 기업들이 가장 큰 수혜자들이다.
변호사법상 외국 변호사들로부터 법률 자문을 받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외국 로펌의 법률자문이 필요한 상황에서 기업들은 음성적으로 외국 로펌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김준동 박사는 “법률시장 개방 이후 외국 로펌들이 국내에 사무소를 세우고 영업을 하게 되면 좀더 편리하게 법률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편리하게 질 좋은 서비스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수임료가 낮아질지는 의문이다.
외국 로펌의 경우 국내 변호사보다 원래 시간당 자문료가 비싼데다가 국내에 사무실을 만들 경우 그만큼 수익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김상곤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최고급 이른바 하이엔드(high-end) 법률 서비스에 대한 수수료는 올라가고 정형화된 자문 서비스, 로엔드(low-end) 서비스에 대한 자문료는 내려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10대 로펌 지각변동=요즘 로펌 업계에서는 로펌간 M&A나 변호사들의 회사 이동과 관련한 각종 소문이 나돌고 있다. 아직까지 가시적인 움직임은 없으나 변호사 업계에서는 수년 이내 중대형 로펌의 지각 변동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산업연구원의 고준성 박사는 “완전개방 이후 현재 10대 로펌의 순위가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국내 변호사 기준 100명 이상을 보유한 대형 로펌들은 독자생존 방식을, 중소형 로펌은 외국 로펌과의 제휴ㆍ합작을 활발하게 모색하고 있다. 대형 로펌은 자칫 잘못 M&A를 시도했다가는 기존 조직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이정훈 법무법인 태평양 대표변호사는 “법률시장 개방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곳은 바로 대형 로펌이다. 그동안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외국 로펌들과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소 로펌의 생각은 다르다. 변호사 수 50여명 규모의 한 중형 로펌의 대표변호사는 “앞으로 3~5년이 고비다. 이 시기에 국내 로펌간의 M&A뿐 아니라 외국 로펌과의 합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현재 빅 5를 뛰어넘는 로펌이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먼저 개방한 외국은ㆍㆍㆍ
독일 - 상위 10개社중 1곳 빼고 영·미게에 흡수합병
일본 - 덩치키운 로펌만 생존… 지금도 합병작업 지속
세계 시장을 제패하고 있는 영ㆍ미계 로펌에 먼저 빗장을 연 외국은 어떻게 됐을까. 90년대말 일시에 개방한 독일은 국내 상위 로펌 10개중 헹겔러 무엘러 한 군데만 빼고 9개가 영ㆍ미계 로펌에 흡수합병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대륙법계로 준사법기관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독일 로펌은 규모가 가장 큰 로펌이 200명 내외의 변호사를 갖고 있었다. 1000명이 넘는 영ㆍ미계 로펌은 철저히 고객 중심의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하고 있었고 유능한 독일 로펌 변호사에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며 스카우트에 나서거나 아예 인수합병하는 전략을 취했다.
거대 독일기업도 대거 개방을 전후해 독일로펌보다는 경험과 네트워크를 갖춘 영ㆍ미계 로펌에 인수합병 등 기업자문을 맡기는 추세로 전환됐다.
이에 따라 변호사 200명을 보유하며 국내 최대로펌중 하나였던 가데르츠가 공중분해되는 등 외국계와 손을 잡지 못한 독일 토종 로펌은 고사했다.
독일기업의 상징이었던 벤츠마저 크라이슬러와 920억달러 규모의 합병을 하면서 독일 로펌이 아니라 미국계 셔먼앤드스털링에 맡겨 업계에 충격파를 던지기도 했다. 링크레이터스는 오펜호프를, 프레시필즈는 데링거와 브룩하우스를, 클리포드 챈스는 푼더를 각각 집어삼켰다. 영ㆍ미계 로펌은 처음에는 지분 배당을 받을 수 있는 파트너(equity partner)신분 보장 등 당근을 제시하며 독일 변호사를 영입했지만 이후 비용절감을 위해 무늬만 파트너지 실제 월급쟁이인 월급 파트너(salaried partner)로 격하시키는 경영방식을 취했다.
18년에 걸쳐 단계적 개방을 취한 일본은 일거에 개방한 독일과 달리 쓰나미급 수준의 업계 재편은 없었지만 2005년 6위 로펌인 미츠이(변호사 70여명)가 영국계 로펌인 링크레이터스의 변호사 빼내가기로 문을 닫는 등 여파가 적지않았다.
일본은 1987년 외국법 자문을 허용하면서 단계적 개방을 시작해 2005년 4월 외국계 로펌의 동업ㆍ고용을 허용하며 완전개방을 하기에 이르렀다. 미츠이 등 대형화ㆍ전문화에 성공하지 못한 로펌은 차례로 도태됐고 개방을 앞두고 인수합병 등을 통해 덩치를 키운 로펌은 살아남았다. 지금도 일본 상위 로펌은 생존을 위해 덩치를 키우는데 여념이 없다. 일본 1위 로펌인 니시무라 앤드 파트너스가 5위 로펌인 아사히 코마와 합병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게대표적인 예다. 두 로펌이 합병하면 변호사 500명 규모가 돼 어느 정도 외풍을 견딜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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