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업무보고까지 한 국내 히든챔피언 육성 정책이 별다른 현황 파악이나 검증없이 추진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해외 저명학자 한 명의 '한국의 히든챔피언이 23개'라는 주장을 여과없이 수용해 겉핥기식 전시행정을 펼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히든챔피언은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처음 사용한 용어다. 대중에게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매출 50억유로(한화 약 7조3,000억원) 미만의 지역 1위나 세계시장 점유율 3위 안에 드는 기업을 뜻한다. 지몬은 저서 '히든 챔피언'에서 독일 기업은 1,307개인데 비해 한국은 23개라고 주장했다.
이를 근거로 중소기업청은 지난달 24일 2017년까지 히든챔피언 후보 1,000개를 육성하겠다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업무보고했다. 문제는 지몬이 이런 통계를 내놓은지 2년이 지나도록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학계, 업계 어느 누구도 한국 히든챔피언 현황을 파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제대로된 현황 분석이 없는 것과 정반대로 "너무 적으니 히든챔피언을 육성하겠다"거나 "중견·중소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해달라"는 화려한 수사만 넘쳐나고 있는 형국이다.
대다수 중견·중소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산업의 허리가 될 히든챔피언을 적극 육성하겠다는 정부 의지에는 매우 공감하는 분위기다. 지몬의 분석도 숙고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평가다. 그러나 아무리 한국의 중견·중소기업 부문이 취약하다 해도 아시아 1위, 세계 3위 안에 드는 매출 7조2,000억원 이하 기업이 고작 23개 밖에 안 된다는 주장에는 쉽게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10년부터 한국거래소가 지정하고 있는 '코스닥 히든챔피언' 수는 지난해 기준 총 26개사다. 이들 대부분은 지몬 교수가 언급한 국내 히든챔피언과 전혀 겹치지 않는다. 코스닥 히든챔피언 요건은 해당 업종에서 무조건 세계 점유율 3위 안에 들어야 하고, 규모와 성장성까지 갖춰야 하는 등 지몬 교수의 기준보다 훨씬 까다롭다.
이에더해 지난해 주력 제품이 세계 점유율 3위 안에 든다며 코스닥 히든챔피언 지정을 신청한 코스닥 기업만 47곳에 이른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세계 3위 안에 드는 기업이라도 탈락 위험이 있어 모두 신청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보다 수가 더 많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5일 삼성전자가 협력사를 대상으로 선정한 올해의 강소기업 10곳 가운데서도 멜파스·이랜텍·케이씨텍 등 3곳이 해당 제품에서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들은 모두 한국거래소 코스닥 히든챔피언과는 중복되는 기업이 아니며, 케이씨텍은 유가증권시장 상장 기업이다. 유가증권시장 상장 종목이나 비상장사에까지 대상을 확대할 경우 실제 우리나라 히든챔피언 수는 23곳보다 한참 많을 가능성이 높다. 또 산업통상자원부가 조사한 세계시장 점유율 1위 품목 149개 중 중견ㆍ중소기업 제품은 79개다.
지몬 교수조차 지난 2009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히든챔피언은 어떤 기업들인가"라는 질문에 "정확한 숫자는 갖고 있지는 않지만 25개 정도, 혹은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본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에대해 중기청 관계자는 "중기청이 히든챔피언 요건에 해당하는 국내 기업 숫자를 따로 파악한 적은 없다"며 "지몬 교수가 아무래도 독일인이다 보니 그쪽 지역에 분석 기업이 몰려 있는 게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히든챔피언=전략 & 마케팅 컨설턴트 업체인 지몬-쿠허&파트너스의 헤르만 지몬 회장이 쓴 '히든챔피언'에서 포춘 500대 기업에 들지 않지만 지역 1위·세계 3위 안에 드는 글로벌 우량기업을 지칭한 말이다. 지몬 회장은 2012년 현재 전세계 히든챔피언은 총 2,734개이고 이중 그의 모국인 독일 기업은 1,307개, 같은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와 스위스가 각각 116개, 110개라고 주장했다. 독어권이 아닌 나라 가운데는 미국(366개), 일본(220개)을 제외하고 100개를 넘는 곳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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