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권단이 동부하이텍의 해외매각을 검토하면서 지난 2002년 하이닉스반도체의 해외매각 추진시 불거졌던 기술 및 국부유출 논란이 재점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이닉스반도체는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매각되기 직전까지 갔다가 막판 가격차 등으로 무산됐으며 이후 국내 기업인 SK가 인수한 뒤 조 단위의 이익을 올리는 등 효자로 재탄생했다. 동부하이텍 역시 하이닉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섣부르게 해외매각에 나설 경우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채권단은 동부하이텍을 해외기업에 팔더라도 기술유출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정부는 국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고려해 해외매각은 신중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일각에서는 당초 기대와 달리 동부하이텍 인수전에 국내 대기업들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채권단이 해외매각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해외매각시 뒤따르는 기술유출 논란을 사전에 없애 딜 무산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24일 금융계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동부하이텍을 해외에 매각하더라도 기술유출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내부 결론을 내렸다.
금융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산은이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인 동부하이텍의 기술 수준을 해외의 동종업계와 면밀하게 비교해 파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해외에 매각하더라도 기술유출 우려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홍기택 산은지주회장은 지난 1월 말 미국 실리콘밸리 출장길에 동부하이텍의 기술 수준을 파악해 비슷한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동부하이텍의 기술은 시스템반도체 분야 경쟁력이 뛰어난 중국이나 대만 업체들과 비교할 때 비슷하거나 약간 뒤져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산은이 동부하이텍에 대해 기술유출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 내린 데 대해 해외매각을 위해 군불을 때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나 자동차 같은 대규모 장치 산업을 해외에 매각할 때 항상 뒤따르기 마련인 기술 및 국부유출 논란을 미리 없애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 게 아니냐는 것이다.
과거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 매각 과정에서 홍역을 치렀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것이다.
채권단은 2002년 하이닉스반도체의 해외매각 방침을 정하고 미국 마이크론에 메모리반도체 부문을 매각하려다 이사회의 반대로 무산됐다. 채권단은 당시 부채비율이 높았던 하이닉스를 무조건 판다는 입장이었지만 기술 및 국부유출 논란에 휩싸이면서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국가의 핵심 사업을 시장 논리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채권단은 하이닉스는 시스템반도체 사업 부문인 매그너칩만 해외 펀드에 팔고 주력인 메모리 사업 부문은 2004년 국내 기업인 SK에 매각했다.
하지만 현재 동부하이텍의 인수전은 채권단의 당초 기대만큼 뜨겁게 달아오르지 못하고 있다.
SK·현대차·LG 등 그동안 잠재적 인수 후보자로 꾸준히 거론돼왔던 국내 대기업들이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부하이텍을 팔아서 동부그룹의 부채비율을 줄이고 유동성 확보에 나서야 하는 채권단 입장에서는 답답한 상황이다.
산은이 동부하이텍의 인수 후보로 해외기업에도 눈을 돌리는 이유다. 실제 대만의 UMC나 뱅가드처럼 동부하이텍과 기술 수준이 비슷한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들이 동부하이텍의 인수전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은 입장에서는 해외매각 검토로 그동안 미온적이던 국내 대기업들의 인수전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는 산은의 이 같은 움직임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산은의 논리대로 동부하이텍 매각시 기술유출 우려가 없다고 해도 국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국내 반도체 회사 가운데 해외에 팔렸다가 성공한 사례가 없다는 점도 반대 이유다. 동부하이텍은 국내 매출비중이 40%대로 대부분이 중소업체들이다. 동부하이텍이 해외업체에 매각되면 이들 업체는 앞으로 대만 등 해외업체에 반도체를 주문해야 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중소업체들의 물량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소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삼성이나 SK하이닉스처럼 기술 수준이 높은 첨단공정으로 돈을 버는 회사가 있는 반면 동부하이텍처럼 남들이 잘 안하는 위탁생산을 통해 니치 마켓에서 돈을 버는 회사가 있다"면서 "국내 반도체 산업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이 둘이 조화를 이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기술유출 문제를 떠나 해외기업에 매각될 경우 과거 쌍용차의 사례처럼 필요한 기술만 써먹고 나중에 필요 없으면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면서 "약 3,000명에 달하는 동부하이텍의 고용인원을 감안할 때 해외매각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