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김상근(62ㆍ사진) 상보 회장은 권투글러브를 끼기 시작했다. 아직 철없을 나이지만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하지만 '챔피언'의 벽은 높았다. 남다른 소질에도 늘 아마추어대회 준우승에서 만족해야 했다. 이래가지고서는 홀어머니와 두 동생을 먹여 살릴 수 없었다.
군대를 제대한 그는 1973년, 스물셋의 나이로 그는 신영진화학에 입사했다. 요즘만큼이나 그때도 직장을 잡는 건 만만치 않았기에 그는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일했다. 그의 '사업밑천'인 비닐, 필름, 화학재 등 재료를 다루는 기술도 이 곳에서 배웠다. 이렇게 시작된 필름과 김 회장의 인연은 내년이면 햇수로 꼭 40년째를 맞이한다.
김 회장이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로 접어든 건 1977년. 서울 신당동 골목에서 상보화학공업사를 세우면서다. 직원 수는 사장을 포함해 3명. 월 매출 300만원만 나와도 '장사 잘했다'며 직원들과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이던 시절이었다.
이 회사는 이제 세계 최초로 복합광학시트를 개발하고 국내외 디스플레이 업체들에 제품을 공급하는 중견업체 상보로 발전했다. 직원 수는 500명, 올 예상 매출액은 2,300억원이 넘는다. 상보의 초기 모습을 회상하던 김 회장은 "지금 모습을 보면 그때가 상상은 되나"라며 기자에게 묻고는 잠시 감회에 젖었다.
상보의 도약의 비결은 필름이라는 한 우물을 파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업종전환을 전환한 김 회장의 결단력이다. 설립초기 상보는 수출용 섬유를 포장하는 비닐패키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하청에 재하청을 받던 사업구조에 머무르다가는 회사다운 회사로 클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오디오 카세트 테이프에 들어가는 폴리에스터 필름이다.
김 회장은 "당시 오디오 테이프가 막 만들어져서 판매가 시작될 때였지만 재료의 99.9%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며 "당시에는 필름도 무조건 '비닐'이라고 했을 정도로 인식이 없었던 시절"이라고 설명했다.
1년간 기술개발에 매달린 끝에 1979년 상보는 필름 국산화에 성공했다. 제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국내에서 생산을 할 수 있는 업체가 없다 보니 굴지의 대기업들이 제 발로 찾아와 거래해달라고 부탁했다. 1980년이 되자 직원 수는 100명까지 늘어났다.
국내 시장을 장악하자 1984년에는 수출부를 만들고 해외로 나갔다. 이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업체들은 수출을 할 때 무조건 저가 전략을 폈다. 국내에서 100원에 파는 제품을 해외에서는 60원에 파는 식이었다. 반면 김 회장은 거꾸로했다. 해외에서 국내 업체에 파는 것보다 오히려 20~30%정도 가격을 높여 불렀다. 처음에 직원들은 "그래선 장사 못한다"라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그는 "실적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밀어붙였다.
그의 전략은 적중했다. 고가 정책에도 불구하고 상보가 세계 시장의 70%를 장악하게 된 것. 그는 "국내에서보다 비싸게 팔아도 일본 것보다는 30%씩 가격이 쌌다"며 "더구나 외국에 싸게 팔면 오히려 같은 한국 업체의 경쟁력을 망치는 거 아니겠나"라고 설명했다.
90년대 초, 잘 나가던 상보에도 위기가 있었다. 바로 CD라는 새로운 저장장치가 탄생한 것. 그때 카세트용 필름 세계 1위라는 성적에 취해 정체돼 있었다면 지금의 상보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김 회장의 움직임은 빨랐다. 그는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윈도우 필름, 디스플레이용 필름을 발굴해 새로운 세계 1위에 도전했다.
그는 "2003년쯤 브라운관 TV가 아니라 얇은 액정표시장치(LCD) TV가 나왔다"며 "모든 TV는 다 바뀌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고 여기에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탄생한 게 현재 디스플레이업계 '세계 표준'으로 자리잡은 복합광학시트다. 복합광학시트는 디스플레이 뒷면에 붙이는 시트 2장의 기능을 1장으로 통합한 특허 제품이다. 제품가격을 15~20% 낮출 뿐 아니라 불량률을 크게 줄여 LG디스플레이, 샤프, AUO 등 세계적 업체들이 앞다퉈 주문을 하고 있다.
기막힌 업종전환 타이밍에 대해 김 대표는 "돌이켜보면 신기하다"면서도 "한가지 중요한 건 신규 아이템을 결정할 때 계산기를 두드리기보다는 이 사업이 산업발전과 사람들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줄지만 고민했다"고 강조했다. 생활에 이로운 제품이라면 자연히 시장이 커질 거고, 그렇다면 거기에 몸 담고 있는 상보도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김 회장의 지론이다.
지금도 그는 새로운 기술에 투자하며 상보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현재 개발 중인 제품은 탄소나노튜브(CNT)와 그래핀을 활용한 투명전극필름, 윈도우필름에 태양광 발전 기능을 더한 '박막형 태양전지' 등이다. 그는 "이제 상보는 100년가는 기업을 만들기 위한 초석을 다지고 있다"며 "훗날 상보가'약방의 감초'처럼 전세계 산업계에 감초 같은 역할을 할 작은 거인이 됐으면 좋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김회장의 멘토링 한마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