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무기력합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런 분위기라면 추진 중인 정책 일정들은 모두 줄줄이 지연될 수밖에 없어요." (정부 부처 A 과장)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주요 정책이 줄줄이 뒤집혀지면서 관가가 꽁꽁 얼어붙었다. 땅에 납작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다는 복지부동을 넘어 "일을 하면 뭐하냐. 다 뒤집어질 텐데"라는 자조 섞인 얘기까지 나온다. 지난해 '관피아' 논란으로 비난의 화살을 온몸에 맞았던 관가가 다시 휘청거리고 있다. 길게는 몇 년, 짧게는 몇 개월 동안 밤새워 만든 정책들이 줄줄이 후퇴하고 있으니 일할 맛이 날 리가 없다. 사기는 이미 땅에 떨어졌고 힘은 빠질 대로 빠져버렸다.
관가에서는 정치권의 뒷다리 잡기가 선을 넘었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협의하지 않으면 일이 안 되고 협의를 해도 시행을 앞두고 뒤집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정부 부처 B 국장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완전히 당 주도로 바뀌었다"며 "야당보다 여당의 눈치를 더 봐야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정부 정책의 원활할 추진을 위해 당정 협의는 당연히 필요한 수순이다. 때로는 정부가 의원 입법도 요청한다. 하지만 여당의 입김이 너무 강해 정책의 근간을 흔드는 수준까지 이르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최근 연말정산 과정에서 불거진 세법개정안 후퇴 논란이 대표적이다. 당정 협의를 한 것은 물론이고 여야 합의로 통과시켜놓고도 시행상의 문제를 핑계로 스스로 뒤로 물려 원칙을 훼손하는 우를 범했다. 사회부처의 한 국장은 "정치권이 팔짱 끼고 있다가 책임을 온통 정부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꼬집었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핵심 국정과제인 4대 구조개혁을 제대로 이끌고 갈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4대 구조개혁은 정부가 추진했던 다른 정책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폭발력이 큰 이슈들이다.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이 거셀 것은 불 보듯 훤하다.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고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 부처 C 과장은 "구조개혁은 경제활성화 같은 다른 정책과 달리 산 넘어 산이다. 걸림돌도 많다"며 "반발이 있어도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니 추동력을 얻기가 쉽지 않다"며 "누군가 나서서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금처럼 당정청이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갈지자 행보와 공직사회의 위축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공직사회가 청와대와 정치권의 말 한마디에 휘둘리다 보면 제대로 된 정책을 발굴하고 집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는 결국 국민들의 신뢰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책은 내용, 타이밍, 국민의 이해와 설득이라는 3박자가 맞아야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며 "지금처럼 표만 의식한 정책은 내용과 타이밍을 놓쳐 결국 실패로 귀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을 책임지고 밀어붙일 컨트롤타워나 리더십이 없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정책의 추진방향이 옳다면 국민을 설득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공무원들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각 부처는 이를 돌파할 힘이 없다"며 "정책의 중심을 잡고 추진할 주체가 없는 점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대통령의 만기친람식 통치 스타일과 원칙을 넘어선 고집이 아랫사람들이 일을 하기 어려운 구조로 내몰고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형준 명지대 교양학부 교수는 "대통령이 주무장관들한테 권한을 위임하고 책임지고 정책을 추진하도록 해야 한다"며 "주무장관들이 힘이 떨어진 상황에서 소신 있게 정책을 추진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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