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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의 홍수
입력1999-03-08 00:00:00
수정
1999.03.08 00:00:00
신문이나 잡지, 서책에 실린 글에 지며이나 인명 또는 단체 이름들이 명문의 머리글자로 돼 있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그 이름들이 익명일 필요가 있을 경우는 모두가 다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우리나라에 있는 땅이요 우리나라 사람이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단체인데도 그렇게들 표기한다.예를 들면 「부산시에 사는 김씨는 한양대학 출신이다」를 「P시에 사는 K씨는 H대학 출신이다」라고 적는 것이다. 부산, 김, 한양을 PUSAN, KIM, HANYANG으로 옮기고 그 머리글자를 따다 P시, K씨, H대학으로 표기한 것이다.
한글 자모를 써 ㅂ씨, ㄱ씨, ㅎ대학으로 표기해도 그 익명성을 충분히 부여할 수 있음에도 굳이 영문을 사용하고 고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너무 심한 진단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우리네 핏속에 숨어 있는 사대주의의 발로라고 말하고 싶다.
또 이러한 표기가 언제부터 비롯된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또한 일제의 잔재가 아닌가싶다.
일본어의 경우 「동경시에 사는 마쓰시다씨」에 익명성을 부여해서 「東시에 사는 松씨」라고 하기도 그렇고 또 그들의 오십음에서 도쿄의 「ト」와마쓰시다의 「マ」를 따다 「ト시에 사는 マ씨」라 하기도 뭣하니까 「D시에 사는 M씨」로 했던 것일테고 그것이 오랜 일제기간에 굳어져 우리는 아무런 비판없이 지금까지 써내려온 게 아닌가싶다.
길거리에 내걸린 간판 속의 그 숱한 외국어들은 또 무엇을 뜻하는가. 다방이니 찻집이니 하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하던 업소에서 자꾸 손님이 줄자 간판을 까페로 바꾸었더니 다시 손님이 늘더라는 웃지 못할 실화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PC통신 등에서 신세대들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는 우리말은 우리나라의 장래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기야 학자들이 쓴 글에도 얼마든지 거기에 걸맞는 우리말이 있음에도 외국어로 도배를 한 것이 많지 않은가.
누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는 모르나 일국의 대통령을 YS, DJ 등의 단순한 영문의 기호성 문자로 표기하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와이셔츠가 YS고 디스크자키가 DJ다」라는 말은 과연 술자리의 농담으로만 흘릴 것인가.
추사(秋史)·도산(島山)·백범(白凡)·고당(古堂)·외솔·한뫼·가람으로 불리웠던 옛 어른들의 시대는 비록 여러 가지로 어려웠을 망정 뚜렷한 정체성과 사람사는 멋스러움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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