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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를 보내며-20세기 20선] 2. 오너기업인
입력1999-12-13 00:00:00
수정
1999.12.13 00:00:00
손동영 기자
20명의 기업총수들 가운데는 21세기를 화려하게 맞이할 거대기업을 일군 성공한 기업가도 있고 한때 한국최고의 재벌이었으나 시대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쇠락한 기업가도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기업가 20인을 출생연도 기준으로 소개한다.◇유한양행 유일한(柳一韓)= 1895년 평양에서 8남매중 장남으로 출생. 1904년 아홉살때 귀국하는 선교사를 따라 미국에 간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필라델피라 한인자유대회에서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을 대표로 낭독하기도 했다.
24년 귀국, 26년 종로2가에 제약회사 유한양행 설립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와 전재산 사회환원. 혈연관계없는 전문경영인에 경영권 이양등을 실천했다. 해방후 약품 수출입·자동차수입·철공업·선박보험 대행·토산품 수출업 등으로 영업을 확대했다. 68년에 세무사찰 받은 후에는 오히려 국세청선정 모범납세업체로 선정되기도했다. 철학을 지닌 기업가로 불린다.
◇삼양사 김연수(金秊洙)= 1896년 전북 고부에서 1만5,000석지기 호남 최대거부 김경중(金暻中)의 2남으로 태어난 대표적 민족기업가로 근대경제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24년 순수민족자본회사인 삼양사의 전신 삼수(三水)사를 설립했다. 농장과 간척사업을 하던 이 회사는 6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제당업을 비롯, 폴리에스터섬유, 수산, 축산, 견방등 사업을 추진했다. 30년대 국내 10대재벌로 사세를 자랑하던 삼양사는 70년대 고도성장기에 많은 후발기업들이 기업확장을 꾀할 때 내실을 다지는 쪽을 택했다.
◇두산 박두병(朴斗秉)= 두산의 초석을 다진 인물. 1910년 박승직(朴承稷)의 장남으로 태어난 박두병은 1896년 설립된 한국최초의 기업 「박승직상점」을 물려받아 두산산업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동양맥주를 비롯, 여러 계열사를 인수하며 현재의 틀을 갖추었다.
◇화신 박흥식(朴興植)= 일제시대 민족기업을 일으켜 백화점 왕으로 불리던 인물. 1903년 평남 용강출생. 20년 고향에서 자본금 5만원으로 선광(鮮光)인쇄소를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28세때 화신상회를 인수, 화신백화점으로 키우면서 당대최고 갑부이자 기업인으로 부상했다. 일제말 화신산업과 대동흥업·화신백화점·대동직물·화신무역·선일직물 ·화신상사 등 계열사를 거느리며 최초의 재벌을 형성했다. 66년 비스코스를 생산하는 흥한화섬 설립이후 내리막길을 걸었고 73년 전자회사 화신소니를 설립했으나 화신백화점 부도로 연쇄부도를 내면서 몰락했다.
◇진로 장학엽(張學燁)= 1903년 평남 용강에서 태어났다. 21살때 교직을 그만두고 양조업에 투신했다. 『소비자의 입은 속일수 없다』는 기업철학을 모토로 신용을 최우선시하는 경영을 통해 한국의 대표적인 주류업체 진로를 일구어냈다. 한국전쟁이후 월남해서 서울에서 맨손으로 재기에 나서 영등포구 신길동에 소주공장을 설립, 내로라하던 기업들이 군웅할거하던 소주시장을 평정했다.
◇코오롱 이원만(李源万)= 1904년 경북영일 출생. 경북 산림조합 기수보로 출발, 29세때 일본 건너가 오사카에서 광고모자 전문제조업체인 욱(旭)공예를 서립했다. 51년 삼경물산을 설립, 기적의 섬유로 불리는 나일론원사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했다, 57년엔 한국나이롱을 세워 직접 나일론 생산에 나서며 화학섬유시대를 열었가. 5·16후 수출공단 조성을 주장, 63년 한국수출산없공단 창립 위원장을 맡아 구로공단, 구미공단 조성하며 수출의 기수로 떠올랐다.
◇경방 김용완(金容完)= 우리경제가 가장 혼란했던 시기에 재계를 이끈 근대경제사의 주역. 경방은 일제시대 주주공모방식으로 창립한 민족기업으로, 김용완은 46년 경방을 맡은 이후 주식분사을 가속화하고 종업원 지주제를 확립했다. 이 때문에 경방의 주인이라기 보다 전문경영인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64년 4대 전경련회장을 맡았다가 나중에 9대에서 12대까지 4대를 연임, 총 5대 10년동안 업무를 수행하며 재계지도자로 위치를 지켰다. 1904년 충남 공주출생.
◇효성 조홍제(趙洪濟)= 1905년 경남 함안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앙고보시절 6·10만세운동때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48년 이병철과 함께 삼성물산공사를 설립, 부사장으로 일하며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을 세우며 삼성의 기반을 마련했다. 62년 56세때 뒤늦게 15년 동업을 끝내고 효성그룹의 모기업인 효성물산을 설립, 창업주로 변신했다. 66년 울산에 동양나일론을 세우며 70년대 섬유호황을 타고 기업확장에 성공,한국타이어·대전피혁 등 거느린 재벌로 성장했다.
◇LG 구인회(具仁會)= 1907년 7월 경남 진양 출생. 500석 지기 부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8년 저축사(일종의 소비조합)를 인수, 지수협동조합을 만들며 본격적으로 기업경영에 나섰고 31년 진주로 나와 포목상 차리고 「구인회상점」을 설립했다. 45년 조선화학사 전무를 거쳐 46년1월 락희화학공업사를 창립했다. 55년엔 10대기업중 락희화학이 4위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59년 국산라디오 생산에 나서며 국내전자산업을 개척했다. 반도상사·금성전자·호남정유등을 잇따라 설립, LG그룹의 터전을 닦았다.
◇삼성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회장은 1910년 경남 의령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보수집의 대가였고 누구보다 멀리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있었다. 용병의 달인이란 호칭도 들었다.
대한민국 최고재벌이었던 그는 유난히 많은 영욕을 거쳤다. 해방후 서울에서 벌였던 사업은 6·25로 물거품이 됐고 4·19당시에 부정축재자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80년 5·17이후엔 동양방송을 내놓기도 했다.
◇쌍용 김성곤(金城坤)= 1912년 경북 달성군에서 태어났으며 대구에서 상공은행 행원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62세인 1974년에 타계할 때가지 쌍용양회 등 5개 계열사를 이끌었다. 쌍용은 장남 김석원 회장 취임이후인 76년부터 정유, 중공업, 건설, 증권, 자동차 등 기업을 차례로 설립하며 대재벌로 부상했다.
◇현대 정주영(鄭周永)= 때를 아는 통찰력과 예지·추진력, 근검절약의 생활철학으로 이른바 「정주영 스타일」을 창조했다. 1915년 강원도 통천에서 6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세때 네번재 가출, 부두노동자·건축공사장 인부 등으로 연명하던 그는 38년 경일(京日)상회, 41년 자동차수리공장 아도(ART)서비스를 설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세웠다. 48년 자동차공업사를 통합한 현대토건사 간판을 내걸면서 현대그룹의 탄생을 알렸다. 98년에는 역사적인 소떼방북을 통해 금강산관광사업을 실현시키는 등 남북경협에 새장을 열었다.
◇동양 이양구(李洋球)= 1916년 함남 함흥출생으로 지난 47년 동양식량공업 부사장으로 시작, 동양제과·동양시멘트 회장을 지냈다. 31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식료품도매상 함흥물산에 사환으로 취직, 돈을 벌어 23세때 대양상회 설립하며 사업에 뛰어들었다. 분단이후 단신 월남, 53년 동양제과의 전신인 풍국제과 인수하고 55년 제일실업을 설립, 무역업 나선데 이어 57년 동양시멘트인수, 독자적인 그룹 구성했다. 71년 회사정리절차에 들어가는 아픔도 겪었으나 77년 주택경기 호황으로 재기했다.
◇대림 이재준(李載濬)= 1917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10대후반부터 부친이 운영하던 한일정미소에서 일하며 상인으로서 성실성과 근면성을 배웠다. 39년 대림산업의 전시인 부림상회를 창립했으나 남북분단으로 평북 신고산 벌목장을 통째로 잃는 아픔도 겪었다. 베트남에서 국내업체 가운데 건설공사 1호를 따내는 등 건설업계의 대표주자로 자리를 굳혔다.
◇한진 조중훈(趙重勳)= 1920년 서울 미근동에서 4남4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45년 11월 중고트럭 1대를 밑천으로 인천 해안동에 운송회사 겸 무역회사인 한진상사를 설립, 한진그룹을 거대 운송업체로 성장시켰다. 56년 11월 미군 물자수송권을 따내며 군납에 나섰고 월남특수경기를 누리던 성장기를 거쳐 69년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한 이후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올들어 세무비리 사건으로 큰 시련을 겪고 있다.
◇동아 최준문(崔竣文)= 1920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45년 충남 대전의 허름한 한옥 사랑채에 「충남토건사」를 설립한 후 58년 대천 방조제 건설을 완료, 사업의 본궤도에 올라섰다. 동아건설로 이름을 바꾼후 63년 당시 국내최대규모인 36억원짜리 전북 동진강 간척공사를 『완공하지 못하면 공사비를 환불하겠다』는 의지로 이뤄냈다. 68년에는 국내 최대의 육상운송회사인 대한통운을 인수, 재계를 놀라게 하는 등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평생을 공사판을 누비는 토목장이 회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롯데 신격호(辛格浩)= 1922년 경남 울주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1세에 맨손으로 일본으로 밀항, 조센징장사꾼이란 모멸을 견디며 기업가의 길을 걸었다. 48년 자본금 10만엔, 종업원 10명으로 껌 생산공장인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 오늘날 한일양국에 거대기업군을 거느린 롯데왕국의 모체가 됐다. 50년대말 모국투자를 시작, 한일 양국의 롯데를 경영하고 있는 그는 국내에서 식품, 유통, 관광분야에 집중투자했다. 모든 계열사의 경영을 전문경영인에 맡겨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한화 김종희(金鍾喜)= 1922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김종희는 경기공립상업학교 졸업후인 42년 일제하의 독점화학판매회사인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한 것이 52년 부산 피난시절 주 한국화약을 창업하는 계기가 됐다. 화약사업에서 크게 성공한 그는 70년대 무역·건설·정유·석유화학·기계·금융·식품으로 영역을 확장, 재벌로 성장했다. 투철한 금전철학과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장인(匠人)정신을 가진 인물.
◇SK 최종현(崔鍾賢)=미국에서 귀국한 62년부터 맏형인 최종건(崔鍾建)회장의 사업에 합류했으며 73년 최종건회장의 예기치않은 타계로 44세에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선경의 숙원인 석유에서 섬유까지 완벽한 수직계열화를 이루었다. 80년 재계의 예상을 뒤엎으며 삼성을 제치고 대한석유공사를 인수, 오늘의 SK㈜를 중심으로 한 SK그룹을 일궈냈다. 94년에는 한국이동통신을 인수, 그룹의 주력인 SK텔레콤을 세웠다. 98년 타계할 때까지 전경련 회장으로서 남다른 친화력을 발휘, 재계 수장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대우 김우중(金宇中)=지난 67년 맨손으로 대우실업을 창립, 재계 2위의 대그룹으로 키워온 김우중은 70년대이후 샐러리맨들에겐 「신화」 였고 대우는 한국경제 산업정책의 응축 자체였다. 특히 92년부터 「세계경영」에 몰두하며 직접 세계를 누볐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체제이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올해 그룹해체를 맞았다. 무한확장과 차입경영의 결과였다. 98년 6월 전경련 회장에 취임, 정부와 재계의 가교역할까지 떠안기도 했으나 지난 11월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손동영기자SONO@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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