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경기침체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계부채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한은이 12일 지난 1년 동안 3.25%로 꽁꽁 묶었던 기준금리를 내린 것은 경기둔화와 가계부채를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경제성장 기반마저 붕괴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반영한 것이다. 거꾸로 경기둔화 속도가 그만큼 빠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일본 등 글로벌 경제주체들이 부양을 위해 기준금리 인하, 양적완화 등에 나서는 상황에서 금리를 그대로 둘 경우 자본흐름이 왜곡된다.
무엇보다 이번 금리인하가 주목되는 것은 정부의 거시정책 흐름이 '경기부양'으로 턴하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에는 부정적 입장을 고수하지만 재정을 비롯한 다른 정책조합에서는 얼마든지 부양책을 쓸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셈이다.
이를 토대로 시장에서는 한은이 연말까지 한 차례 더 금리인하를 단행할 것이라는 분석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홍정혜 신영증권 애널리스트는 "연내 0.25%포인트 더 내릴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장기화되는 글로벌 경제침체=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는 글로벌 경기침체가 1년 이상 동결됐던 기준금리의 변화를 이끌었다. 한은도 앞으로 세계경제의 회복속도가 당초 예상보다 더뎌질 것으로 보고 있다. 유로 지역 재정위기를 둘러싼 불확실성과 국제금융시장 불안, 주요국 경제부진 가능성 등을 따져볼 때 성장의 하방 위험이 더욱 커질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중국ㆍ유럽 등 각국 중앙은행들이 금리인하로 경기부양에 나서고 있는 점도 기준금리 동결을 고수한 '독불장군' 한은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됐다. 중국 인민은행은 최근 한달 동안 두 차례나 기준금리를 내렸고 유럽중앙은행(ECB)도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했다. 김중수 한은 총재가 기준금리 결정을 내릴 때마다 금리 결정의 가장 큰 잣대가 해외변수라고 강조했던 만큼 이날 금리인하 카드는 글로벌 금리ㆍ통화정책에 공조하는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짙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유럽 재정위기 여파가 국내 실물경기로 번지는 것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의지가 이번 금리 결정에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내 실물경제도 위험=실제 국내 실물경제지표들이 여기저기서 적신호를 보내고 있다. 먼저 수출과 내수 증가율이 급락하거나 둔화됐다. 지난해 3ㆍ4분기만 해도 21.4%에 달했던 수출 증가율은 4ㆍ4분기 9.0%까지 추락했으며 올해 1ㆍ4분기에도 3.0%까지 곤두박질쳤다. 소매판매 증가율 역시 지난해 3ㆍ4분기 4.7%에서 4ㆍ4분기 1.9%로, 올해 1ㆍ4분기 2.0%로 둔한 움직임을 나타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같은 기간 3.6%에서 2.8%로 줄어 당초 예상보다 부진했다.
게다가 최근 국고채 3년물 금리가 연 3.19%까지 떨어지면서 기준금리를 밑도는 장단기 금리역전 현상이 발생했다. 김 총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장단기 금리역전은 통화당국에는 매우 곤혹스런 상황"이라고 언급, 금리역전 현상이 기준금리 인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했다.
◇가계부채는 0.5% 늘어날 듯=김 총재는 이날 이례적으로 '선제적'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GDP갭에 대한 우려를 언급했다. 실질GDP가 잠재GDP를 밑돌아 경기침체를 예고하는 마이너스 GDP갭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여 경기부양을 위한 선제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얘기다.
기준금리 인하에 따른 실물경제지표 전망치도 조목조목 제시했다.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림으로써 성장률은 올해 0.02%포인트, 내년에는 0.09%포인트 높아지고 가계부채는 0.5%가량 늘어난다는 것이다. 물가의 경우 올해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고 내년에 0.08%포인트 상승 효과를 나타낼 것으로 내다봤다. 결국 이번 결정이 가계부채 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한은의 분석이다.
하지만 가계부채 문제를 고심하는 정부나 금융계 일각에서는 한은의 이번 결정에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찮다. 3월 현재 가계부채 총액이 911조원을 웃도는데다 올해 말까지 이 중 100조원의 만기가 돌아온다. 이 때문에 정부가 가계부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프리워크아웃(사전채무조정)이나 저신용자 신용등급 세분화 등 연일 강도 높은 대책을 내놓고 있는 마당에 전격적인 기준금리 인하로 찬물을 끼얹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가계부채와 물가압박이 현실화되면 이번 기준금리 인하 등 통화정책 운영을 둘러싸고 한은의 금리ㆍ통화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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