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상공부에서 출발한 지식경제부는 다양한 출신성분의 관료들이 모인 '멜팅 팟'(Melting Potㆍ용광로)이다. 출발점이 상공부가 아니어도 출신성분에 꼬리표를 붙이지 않고 업무능력에 따라 대우를 해 주는 문화가 독특하다. 인맥도 학연ㆍ지연보다는 핵심업무를 따라 형성됐다. 정부 정책과 글로벌 경제동향에 따라 핵심업무는 달라졌고, '통상맨' '산업통' '자원통'으로 불리는 큰 흐름을 지나왔다.
지경부는 6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지만 토착세력이 형성될 여건이 안 됐다. 우선 정권의 손 바뀜에 따라 조직이 흔들렸고 큰 폭의 변화가 수반됐다. 외형으로만 봐도 상공부에서 동자부가 떨어져 나왔다가 합쳐져 상공자원부가 됐고, 통상산업부로 바뀐 후 2년 만에 산업자원부로 개편됐다. 그 과정에서 공업진흥청ㆍ특허청 등이 분리됐고, 통상업무를 맡던 직원들은 통상교섭본부로 빠져나갔다. 반면 지경부가 되면서 정보통신부의 우정사업본부와 IT산업 육성, 과학기술부의 산업기술 R&D, 기획재정부의 경제자유구역과 지역특화기획 업무와 인력이 넘어왔다.
여기다 62년 동안 장관은 65번이나 바뀌었다. 외부에서 새로운 장관이 1년에 한번 꼴로 오다 보니 어떤 세력도 지속직인 힘을 받지는 못했다. 또 전부 한 곳에 모여 얼굴보고 일하는 것도 업무 외적인 특별한 인맥을 만들지 않은 이유로 꼽는다. 한 지경부 국장은 "해외 또는 지방 근무가 많은 외교부나 국세청처럼 본부로 복귀하기 위해 줄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며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줄을 동원해 보직을 받으면 장관이 바뀐 후 후폭풍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학맥도 맥을 못 춘다. 대학은 서울대가 절반 이상을 차지해 차별성이 없고, 고등학교는 잘게 쪼개져 있다. 지역적으로도 묶을 만한 주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이유로 지경부 관료들도 효과가 불확실한 학연ㆍ지연에 얽매이기보다는 가장 확실한 업무능력 차별화로 승부를 걸겠다는 의식이 강하다.
◇토착세력은 없다. 오히려 외인부대가 득세= "재무부는 파워풀(Powerful), 경제기획원은 오너러블(Honorable), 상공부는 컬러풀(Colorful)하다." 1980년대 재무부와 상공부, 경제기획원 장관을 두루 거친 나웅배 박사가 경제부처의 특징을 요약한 말이다.
상공부는 다양한 인재들이 모여 산업정책 전반을 좌지우지했다. 여러 부처에서 넘어온 공무원들이 컬러풀하게 자기 색깔을 내기도 했지만, '멜팅 팟'처럼 출신성분이 눈에 튀지 않게 잘 섞였다. 상공부 출신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텃새도 없고, 타 부처에서 넘어왔다고 핵심업무의 선임국장 자리를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 국장은 "상사들이 출신성분보다는 업무능력만 본다"며 "그래서 타 부처에서 넘어와 빨리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 외부인사들이 상공부 출신보다 승진이 더 빨랐다"고 말했다.
실제로 차관 자리에 오른 관료들 중 옛 상공부보다 타 부처 출신이 많다. 안현호(행시25회) 1차관은 첫 출발을 서울시 내무국에서 시작했다. 특허청을 거쳐 1988년 상공부 국제협력관실로 옮겼다. 최근 퇴임한 김영학 전 2차관(24회)도 81년4월 체육부 사회체육과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고위공무원으로 승진한 인사들 중에도 출발점이 타 부처인 경우가 많다. 김경식(24회) 무역투자실장도 과학기술처 공보관실에서 시작해 8년 후 상공부에 자리를 잡았다. 지난 3월 청와대 지식경제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윤상직(25회) 전 무역위원회 상임위원은 인천직할시 총무과ㆍ시정과 출신이고, 그 뒤를 물려받은 진홍(25회) 위원도 1982년 국세청 대전세무서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김동선(25회) 중소기업청장의 첫 근무지도 특허청 국제협력담당관실이었다. 핵심보직 중 하나인 대변인도 타 부처 출신이 맡았다. 김준동(28회) 전 대변인(신사업정책관)도 85년 체신부 국제우편과, 내무부를 거쳐 상공부로 넘어오는 등 타 부처 출신이 오히려 득세했다. 타 부처에서 넘어온 공무원이 많지만 그렇다고 출신부처별로 인맥을 형성하지는 않았다.
◇통상맨ㆍ산업통ㆍ자원통 3대 라인= 상공부는 상업ㆍ무역ㆍ공업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면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무역입국'을 내세우며 매달 무역진흥확대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상공부가 올린 안건이 무진회의를 통과하면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이 뒤처리를 맡았다. 1979년 일명 무진회의가 종료될 때까지 무역을 관장하던 상역국과 산업발전을 주도하는 산업정책국이 핵심이었다. 공대 출신 중 최초로 행시를 수석 합격한 이희범(12회) STX에너지ㆍ중공업 회장은 1979년 수출진흥과 사무관으로 무진회의 실무를 맡았다. 수출과장, 자원정책실장과 차관을 거쳐 2003년 장관에까지 오르는 등 무역과 통상라인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무역은 1980년대 주춤했다가 상공부 출신인 신국환 장관이 취임한 2000년대 다시 힘을 받았다. 당시 신 장관의 지휘와 오영교 차관의 혹독한 업무훈련을 받은 최준영(20회), 나도성(22회), 임채민을 '오영교 학당'이라 부르기도 했다.
1980년대는 국제화가 화두로 등장했다. 미국의 개방화 요구가 거세지면서 철강ㆍ조선ㆍ섬유 등 주력업종을 중심으로 통상마찰이 불거졌다. 정책의 무게중심이 무역에서 통상으로 옮겨졌고, 통상은 상공 관료의 필수코스였다. 대외적 교섭력과 자유로운 영어토론이 가능해야 하고, 산업의 실상과 비전도 꿰뚫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핵심인재들만이 '통상맨'이 됐다. 당시 행시 합격자들의 지원 0순위가 산자부로 꼽힐 정도로 통상은 인기를 끌었다.
1988년 한승수 장관을 시작으로 박필수ㆍ이봉서ㆍ김철수 등 국제감각이 있는 장관이 통상협상을 주도했다. 조환익(14회) 코트라 사장도 통상과 산업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김종갑(17회) 하이닉스반도체 이사회 의장도 능통한 영어, 탁월한 대외감감과 균형감각으로 사무관시절부터 통상협력국장이 될 때까지 대미 통상업무를 맡았고, 이재훈(21회) 장관후보자도 미주통상담당관을 지내 통상맨으로 꼽힌다. 임채민ㆍ이종건(26회)ㆍ김동선은 사무관 때 '슈퍼 301조 협상' 등 대미 통상업무를 맡았다.
1995년 WTO가 출범하고, 1996년 OECD에 가입하면서 산업정책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처의 핵심업무가 통상에서 기술지원(R&D)ㆍ산업으로 옮겨졌다. 이희범 전 장관의 서울공대 후배인 오영호(23회) 산업기술국장이 기술국을 이끌었고 임채민이 그 자리를 넘겨받았다. 이후 안현호(25회), 정재훈(26회), 이관섭(27회), 김준동(28회)으로 이어지는 기술국의 산업통 라인이 형성됐다.
자원통은 이희범 장관이 취임한 2003년말 이후 서서히 부각됐다. 당시 20달러에 불과했던 유가가 2005년, 2006년을 지나면서 70달러로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수급관리라는 수비적인 자세를 취하던 자원 정책이 자원확보라는 공격적인 정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자원통의 좌장은 한준호(10회) 전 한전 사장이 초대 에너지정책국장을 거쳐 자원정책실장과 기획관리실장을 지냈다. 뒤를 이어 이원걸(17회), 김신종(22회), 김정관(24회), 문재도ㆍ한진현(25회), 도경환(29회) 등이 자원통의 맥을 이었다. 특채로 채용됐던 고정식 전 특허청장도 에너지 전문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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