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10곳 중 7곳은 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 초기에 진입했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나 일반인이 인식하는 것보다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핵심주체인 기업이 경기가 더 나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기업이 설비투자 및 신규 채용을 꺼리는 것도 우리 경제의 현 상황과 향후 불확실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서울경제신문이 22일 대학 교수와 싱크탱크 연구원, 금융권을 포함한 민간 기업 임원, 공직자 등 오피니언 리더 111명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기업 관계자 40명 중 71.8%가 현재의 경제 상황을 '디플레이션 초기'라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 중에서는 절반이 약간 넘는 55%가 '디플레이션 초기'에 진입했다고 평가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 교수는 "소비자물가와 생산자물가가 사실상 마이너스 상승률을 보이고 있는 만큼 디플레이션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며 "디플레이션이 부동산 등 자산가격 하락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정책 공조가 다급하다"고 진단했다.
◇민간의 체감경기 더 심각=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 초기'라고 답한 비율은 민간 기업(71.8%), 공직자(46.2%), 민간 연구소(45.7%), 대학(45.5%)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다른 직종에 비해 기업이 압도적으로 높다. 또 5.5%는 '이미 디플레이션에 진입'했다고 응답, 총 60.5%가 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 영향권에 들어온 것으로 평가했다. 현 경제 상황을 '디스인플레이션(지속적 물가하락)'이라고 본 응답자는 전체의 21.1%, '일시적 저물가'를 선택한 응답자는 18.3%였다.
이 같은 경기 인식은 "석유류와 농식품을 뺀 근원물가가 2%대인 만큼 디플레이션이 아니다"라고 밝힌 정부 및 한국은행과 민간의 체감경기 괴리가 상당함을 보여준다. 실제 정부가 확장적 재정정책 등 경기 부양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연초 실물지표 부진에 올 1·4분기 경제 성장률도 0%대에 그쳐 6분기 연속 0%대 성장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설문은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 등 신흥국 경기 둔화, 외부 최대 요인=경제 전문가들은 우리 경기를 위협하는 가장 큰 외부 요인으로 '중국 등 신흥국의 경기둔화(58.2%)'를 꼽았다. 반면 미국의 조기 금리 인상이 위협 요인이라는 답변은 27.3%로 중국의 경기 둔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과거 연 10%대 성장세를 구가하던 중국은 현재 6%대 성장률을 우려할 정도로 고속성장엔진이 점점 식어가고 있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한국 수출 비중의 26%를 차지하는 중국의 경제 둔화는 결국 경제성장률마저 악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반면 일본의 양적완화(6.4%)와 유로존 위기(6.4%) 등을 위협 요인으로 꼽는 답변은 많지 않았다. 저유가에 따른 산유국 위기가 위협 요인이라는 의견은 1.8%에 불과했다.
◇새로운 먹거리 없어…구조적 요인 심각=전문가들은 우리 경기를 위협하는 내부 요인으로 신성장동력 부재(33.9%)를 꼽았다. 이어 내수부진(28.4%), 저성장·저물가(16.5%), 가계부채(15.6%), 재정악화(3.7%) 등이 지목됐다. 눈에 띄는 점은 대외적인 위협 요인은 중국의 경기 둔화와 미국 금리 인상 등으로 크게 압축됐던 반면 내부 요인에 대한 답변은 어느 한쪽으로 쏠림현상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경제의 성장세가 식어가는 구조적인 요인이 특정 분야를 지목할 수 없을 만큼 켜켜이 쌓인 탓으로 분석된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기업이 현금을 쌓아놓고 있는 것은 대내외 환경이 워낙 안 좋기 때문에 장기 투자를 할 수 없는 탓"이라며 "규제 완화 등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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