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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해외동포·주재원 수필공모 시상] 우수상 이희태씨

한국산 부품제조설비 판매의 중국 선봉에 서다


2001년 9월 중국에 있는 제조업체에서 5년 간의 임기를 끝내고 자영업으로 들어선 지 2년 반이 지났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당시 대기업처럼 임기가 되면 방법없이 물러나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원하기만 한다면 더 일할 수도 있었지만,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이에 매너리즘에 빠져 혹시 회사 일을 그르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깨끗하게 후임자에게 업무를 인계했다. (중략) 제조업은 자금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우선 유통관련 일을 하기로 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취급할 아이템을 고르기 위해 골몰했고, 곧바로 이어지는 생각이 있었다. 그 아이템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제조창과의 교감도 너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조건 팔 수 있다고 한들 제조창에서 설비 판매권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고, 준다고 해도 대리권을 한 두 사람에게 국한해야 하는데 원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주어도 고민인 것이 영업 유통업이다. 독점 판매가 일단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전 직장생활 중에 많은 업체가 미국·일본·독일·이탈리아산 설비와 재료의 독점 판매권을 바탕으로 부품 제조업체를 통해 위탁 판매하면서 커미션을 챙기는 것을 보아온 나로서는 일단 광맥(鑛脈)은 자신의 밑에 있다는 생각에서 18년간 일한 전기부품 제조기술을 기반으로 중국에 국산 제조설비 판매에 초점을 맞췄다. 반 년의 시간이 또 다시 지나고 겨우 사업 아이템을 잡은 뒤 제조업체와 상의한 끝에 판매품목이 결정되어 중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외국인이 사무실을 얻으려면 안전한 곳이어야 한다는 조언에 따라 쑤저우의 한 호텔에 사무실을 두고 사람을 모집한 뒤 2002년 2월 영업활동에 나섰다. 한ㆍ일 월드컵으로 인해 한국이란 나라가 중국 전역에 서서히 알려지던 때였다. 한국산 설비가 중국업체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위해서는 일단 중국기업이 그 기계를 사서 돌려보도록 하는 게 중요한 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중략) 성능은 세계 정상급인데 문제는 사용자들의 평가가 없다는 것이 숙제였다. 1만2,000rpm 회전력을 자랑하는 권취기와 분당 350m를 자르는 초고속 절단 스리터지만 써보기 전에는 먹히지 않고, 이미 독일ㆍ스위스ㆍ이탈리아 기계가 선점하는 시장이기에 더더욱 시장진입에 어려움이 컸다. 그러던 어느날, 13만 달러인 이탈리아 기계와 20만 달러인 독일·스위스산 제품의 중간 수준인 한국산 제품에 대해 일단 중국의 한 업체가 관심을 보이자 ‘특별가격’으로 제공키로 하고 두 대의 기계를 팔기로 했다. 그러나 창업 1년만인 2003년 2월 2대의 기계가 입찰을 통해 유럽산 제품을 제치고 중국으로 수출되는 과정에서 뜻밖의 불운이 찾아왔다. 현지 통관 후 이동하는 과정에서 1대의 기계가 충격을 받아 그대로 수직 하강한 것이다. 포장을 풀어 보니 전면의 판넬이 주저앉아 나사가 부러지는 등 제대로 성능을 발휘할 것 같지 않았다. (중략) 다행스럽게도 두 대 중 한 대는 이상이 없었는데, 신통치 않게 평가를 하니 속이 상하지만 일단은 두고 보기로 했다. 이 시기에 대만에서 개발된 비슷한 기계가 10만달러 이하로 판매되면서 어려움이 더 커졌다. 그 후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보내다 보니 거의 1년 반 이상 수입 없이 지나는 상태가 계속됐다. (중략) 여직원과 부사장이 사정을 딱하게 여겨 급여를 받을 수 없다며 사표를 내니 반려 시킬 수도 없었다.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경비절감을 위해 사무실을 좁은 곳으로 옮기고 일단 수명연장에 들어갔다. 이 와중에 운명의 신이 나를 버리지 않는 듯 전부터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중국업체의 사장이 한국산 권취기를 사겠노라고 상담을 요청해왔다. 열심히 상담했다. ‘내가 운영하던 기계다. 먼저 입고된 그 회사는 운반 중에 운이 나빴다. 너희들 기계는 그럴 수 없다. 지금도 브라질이나 인도 쪽에서는 꾸준히 팔리고 있다. 품질이 나쁘다면 어떻게 다른 데서 팔리겠는가’ 하면서 열심히 상담을 했더니 한국을 한번 가보겠단다. 곧바로 한국에 와서 기계를 봤는데 성수기에 대비해서인지 결정이 빨랐다. 각국 권취기의 성능을 모두 비교한 뒤 제일 중요한 AS 상의 적극성을 가질 수 있는 업체를 우선으로 하여 내 중국 근무경력을 들어 기계성능을 믿어 보겠다고 하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마침 제조 중이던 기계가 있기에 앞서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바로 선적을 진행하려고 하던 차에 이번에는 광둥성에서부터 사스(SARS)가 퍼지기 시작했다. (중략) 학교에는 휴학령이 내려졌고, 출장자는 사절이라고 하여 문전박대인 상황에서 공항 및 각 톨게이트에서는 고열이 있는 사람은 입국 금지라는 전제 하에 검역·검색을 하는데, 그 방법이 워낙 원시적이었다. 막대 온도기로 일일이 온도를 재는데 최소한 3분은 있어야 한다고 하며 3분 후 온도를 보고는 통과시키니 온도계 수백개가 있어도 모자랄 판인 데다 한번 쓴 온도계는 소독을 한다고 하는 바람에 각 지역에서는 차량정체와 출입금지가 뒤엉켜 한마디로 난리통이었다. 하지만 중국을 수시로 드나들어야 하는 내 입장은 이런 사정을 보아줄 여유가 없었다. (중략) 일단 기술자 한 명이 남경을 통해 입국한 뒤 대절한 차에 올랐다. 지방을 통과할 때마다 검역에 시간을 빼앗기다보니 시간이 지체되는 것은 당연하고 이러다가는 언제 도착할지 불투명한 상태가 됐다. 약 3시간이면 남경에서 도착이 가능한 거리인 데도 도착시간을 알 수 없게 되자, 안 되겠던지 자기들끼리 연락을 하더니 운행 도중 웬 경찰차가 나타나더니 에스코트를 하는데 각 톨게이트마다 무사 통과고, 대기하는 차들이 비켜주는 관계로 그나마 해 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사히 설치를 마치고 가동을 시작한 뒤에야 입에서 입으로 선전이 시작됐다. 전화가 오고 심심치 않게 방문 요청을 받은 다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판매실적이 제법이다. 올해는 약 10대를 목표로 하고, 내년에는 30대 정도는 판매가 가능할 전망이다. 금액으로 따지면 500만달러 정도다. 씨를 뿌리는 작업이 너무 길다. 제조업도 마찬가지다. 공장을 짓고 제품을 만들어 내고 업체를 다니면서 신뢰를 얻기까지 3년의 세월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하물며 설비를 판매하는데 있어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정도 시간은 당연히 걸리는 것이지만, 막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내 입장에서, 그리고 자금도 넉넉지 않은 상태에서는 너무 긴 여정인 셈이었다. 그러나 유럽업체가 판치는 부품 제조시장에서 한국산 설비가 100% 가동되도록 하는 그 날을 위해 오늘도 중국 땅에서 계속 분투 중이다. ‘연간 1,000만 달러 정도 수출하면 무역협회에서 표창 하나 주겠지’ 하는 기대도 슬쩍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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