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들의 보호주의가 우리나라 정보기술(IT) 산업의 미래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지난해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보호주의 물결이 기술표준의 영역까지 침투하면서 유럽연합(EU)과 중국 등이 자국 기술을 국제표준으로 채택하기 위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이 와중에 한국의 미래 성장 기술들이 자칫 ‘우리만의 기술’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유럽 집행위원회(EC)가 모바일 TV의 유럽 단일표준으로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T-DMB’ 대신 노키아의 ‘DVB-H’를 채택하려는 움직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현재 유럽의 모바일 TV 표준은 ‘T-DMB’와 ‘DVB-H’, 그리고 퀄컴의 ‘미디어플로’ 등 3가지. 그런데 EU는 다양한 표준이 시장을 분열시키는 등 산업발전에 도움이 안된다는 이유로 강제로라도 단일화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비비안 레딩 집행위원이 “유럽 표준은 전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유일한 것”이라며 노키아 기술을 치켜세운 것도 EU 기술의 우월성을 강조해 이를 단일 표준으로 선정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와이브로가 전기통신연합(ITU)에서 국제표준으로 채택되는 데 난항을 겪는 것도 세계시장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중국의 자국 기술 보호 의지 때문이다. 자국에서 개발된 중국형 3세대(3G) 이동통신 기술인 ‘TDS-CDMA’를 키워야 한다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특히 ITU 총회의 결의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로 이뤄지기 때문에 중국이 끝까지 버틸 경우 와이브로의 표준 채택이 연기되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무산될 수도 있다. 실제로 정보통신부의 한 관계자는 “중국의 경우 와이브로 기술이 채택되면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다”며 “만약 중국이 끝까지 반대할 경우 10월 총회에서 표준채택이 안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러한 기술표준이 단순히 ‘기술’ 자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래 성장동력이 자칫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정통부는 올초 와이브로ㆍDMB 등을 8대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선정하고 집중 육성해왔다. 이 기술들과 이를 적용한 제품군들이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국내시장이 발전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 진출의 길이 열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기술의 표준 채택이 실패할 경우 이 모든 것들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해외 시장 진출이 필수적인데 우리나라 기술이 국제표준으로 채택되지 않으면 우리 기술을 기반으로 한 해외진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국내 기업들은 기술 이전에 따른 로열티 지급에 대한 부담을 안게 되고 이는 결국 가격 경쟁력의 하락을 야기할 수도 있다. 또한 오는 2009년 30억~50억달러 규모로 발전할 유럽의 모바일 TV 단말기 시장이나 2010년 4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와이브로 시장의 상당 부분을 유럽 기업들에 빼앗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국내 제조업체들이 외면하는 ‘한국형’ 표준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시장 규모가 작은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하다 보면 ‘규모의 경제’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단말기 단가가 올라가고 시장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통신서비스 업체들의 비용부담과 한국 시장 전체의 타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동통신사의 한 관계자는 “DMB가 유럽표준에서 빠진다면 국내 지상파 DMB 시장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며 “특정군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단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국내 제조업체가 해외 업체와 제휴를 맺는 것 외에 뚜렷한 대안을 찾을 수도 없다. 통신사의 또 다른 관계자는 “강대국들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는 한 이에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게 사실”이라며 “자칫 우리가 자랑하는 IT 기술이 한국에서만 사용되는 고립된 기술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용어설명 ◆와이브로:이동중에도 가입자당 1Mbps 이상의 전송속도로 초고속 무선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통신서비스로 휴대인터넷이라고도 한다. ◆T-DMB: 한국에서 개발한 지상파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 기술. 음성ㆍ영상 등 다양한 멀티미디어 신호를 디지털로 보내 휴대용 수신기에서 방송을 볼 수 있다. ◆DVB-H: 노키아에서 개발한 휴대용 유럽형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TDS-CDMA: 중국에서 개발한 3세대(3G) 이동통신 기술. 2세대와는 달리 고속으로 고용량의 데이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모바일 기술로 한국의 WCDMA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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