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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명 부추긴 금융실명제… 드러난 재산만 5조 달해

취지 못살리고 반쪽 전락


"차명계좌인지 알면서도 고객이 요구하면 계좌를 만들어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차명계좌 개설을 요구한 사람은 처벌하지 못하면서 애꿎은 금융사 직원만 징계하는 게 금융실명제법입니다."

차명계좌를 통한 주가조작과 횡령 등으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CJ비자금 사건을 두고 은행 임직원들이 탄식조로 내뱉는 소리다. 비단 CJ사건만이 아니다. 지난 2007년 이건희 삼성 회장의 4조5,000억원 차명재산이 드러난 삼성 X파일 사건부터 2010년 이른바 신한사태로 불거진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비자금 조성, 최근의 전두환 비자금 추적수사에 이르기까지 경제비리 사건에는 어김없이 차명계좌가 수백~수천개씩 등장한다.

차명계좌는 유명 지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병원장, 예식업장 주인 등 수많은 고소득층은 탈세를 위해 임직원 등 3자 명의로 차명계좌를 운용하고 있으며 국세청 세무조사로 수면 위에 떠오른 차명재산만도 5조원 안팎에 이른다.

금감원은 2010년 금융계에 충격을 줬던 저축은행 대출부실건의 경우도 차명계좌를 통한 불법대출이 6조원에 이르렀다고 6일 밝혔다. 구린 돈의 서식처인 차명계좌가 탈세는 기본이고 주가조작, 배임, 횡령, 비자금 조성, 불법대출 등 온갖 경제범죄의 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달 12일은 금융실명제 시행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이로는 성년을 맞았지만 사실상 차명거래를 허용함으로써 지하거래 양성화와 금융거래 투명화라는 애초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는 반쪽짜리 법안이 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복지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부가가치세 품목 확대, 금융서비스세 신설 등 전반적인 국민의 조세부담을 늘리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에게 국가의 곳간을 채워달라고 요구하기에 앞서 조세가 공평하고 정의롭게 징수되고 있는지를 철저히 점검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윤석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튼실한 선진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국민이 조세의무를 지는 것은 당연하다"며 "하지만 상당수가 불법ㆍ탈법으로 조세를 회피하고 세금이 불공정하게 걷힌다고 국민들이 느낄 때 국가는 엄청난 조세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융실명제 20년을 맞아 조세정의와 공평성을 갉아먹으며 사회통합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차명계좌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시리즈로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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