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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백제의 南遷과 聖王의 죽음
입력2004-04-27 00:00:00
수정
2004.04.27 00:00:00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자질과 능력, 리더십이 부족한 지도자가 나라를 난국으로 이끌고 마침내 멸망에 빠뜨리기도 했던 많은 경우를 알고 있다. 백제 의 성왕(聖王)이 관산성전투에서 패배해 자신을 포함한 전군이 전멸당한 사실만 해도 그렇다.
백제 26대 임금 성왕의 이름은 부여명농. 무령왕(武寧王)의 아들로서 523년에 즉위했다. ‘삼국사기’는 성왕이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처 리함에 있어 결단성이 있었다’고 했지만 관산성전투에서 패사한 정황만 두고 보면 그는 용병술이 모자라고 치밀함도 부족한 인물이었다. 성왕이 즉위할 무렵 백제ㆍ신라ㆍ고구려 삼국관계는 서로 치고받는 험악한 상황이 었다. 특히 신라가 가야와 손잡고 고구려는 계속해서 백제를 압박하고 있어 백제가 가장 불리한 형편이었다. 이에 성왕은 신라와 화친을 모색했다. 그리고 538년에는 도읍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고 하는 등 개혁을 통한 국력의 회복을 꾀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548년에 고구려군이 남침, 백제의 한강 이북 대 고구려 방어요새인 독산성을 포위했다. 성왕은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신라는 군사를 보내 이를 구해줬다. 3년 뒤인 551년에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일으켜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다. 그 보복전에서 백제는 고구려 남쪽의 6개 군을, 신라는 10개 군을 점령했다. 당시 백제가 차지한 6개 군은 한강 하류로 오늘의 서울과 경기도 일대였고 신라가 차지한 10개 군은 오늘의 남한강 상류로 강원도와 충북 일대였다. 그러나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신라가 동맹을 배반했던 것이다. 신라군 총사령관 거칠 부(居柒夫)는 내친 김에 백제가 천신만고 끝에 70년 만에 되찾은 옛 서울한성 지역의 6개 군마저 기습해 차지해버렸다. 그러자 분노한 성왕은 절치 부심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성왕은 한성탈환이라는 눈앞의 성취에만 만족해 신라의 음모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 대비책도 없이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 그렇다고 해서 당시 신라의 군사행동을 비겁하고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전쟁이란 본래 칼로 하는 정치가 아닌가. 동맹관계란 영원히 가지 않는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돌변하는 것이 고대나 현대나변함없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실상이다. 내가 빼앗지 못하면 적국에 빼앗기 고 승리 아니면 멸망뿐인 것이 전쟁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국정운영의 최고책임자든, 기업경영의 총수든 자질이 부족하고 무능하면 국가와 회사에 손해만 끼치고 그것도 모자라면 망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와신상담하던 성왕은 재위 32년(554)에 마침내 복수의 칼을 빼들었다. 그리하여 군사를 이끌고 오늘의 충북 옥천인 관산성을 공격했다. 성왕이 연합군인 대가야와 왜의 군사까지 거느리고 맹공을 퍼붓자 신라는 각간 김우 덕(金于德)과 이찬 김탐지(金眈知)로 하여금 이를 막도록 했으나 백제군의 노도와 같은 기세를 당할 수 없어 서전에서 패퇴했다. 그러자 신라의 신주 (新州ㆍ한산주) 군주(軍主) 김무력(金武力)이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을 구원하러 달려왔다. 김무력은 법흥왕(法興王) 때 신라에 항복한 가야의 왕자 출신으로 김유신(金庾信)의 할아버지이다.
그 소식을 들은 성왕은 뒤에 위덕왕(威德王)이 되는 태자 부여창(扶餘昌)이 걱정돼 밤중에 보병과 기병 50명만 거느리고 달려갔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 첩보를 입수한 신라 삼년산군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구천(狗川)에 매복하고 있다가 전광석화처럼 기습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결국 이 관산성 싸움에서 백제군은 임금이요, 총사령관인 성왕 자신은 물론 장관급인 좌평 4명, 장병 2만9,600명이 전멸당하고 말았다. 임금과 그가 거느린 군대가 전멸했으므로 백제는 개로왕(蓋鹵王)이 고구려의 장수왕(長壽 王)에게 잡혀 죽고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 또다시 멸망의 위기에 빠 지게 되었다.
지금은 삼국시대와는 정치ㆍ군사ㆍ경제적 형편이 다르지만 백제가 서울에서 공주로, 공주에서 다시 부여로 남천(南遷)한 끝에 멸망당한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백제는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한강 하류를 고구려와 신라에 차례로 빼앗기고 남천을 거듭한 끝에 망했던 것이다. 명칭이야수도든 행정수도든 한강 이남으로의 남천은 백제 망국의 역사적 교훈을 망 각한 위험한 발상이다. 충남이 아니라 차라리 포천이나 철원으로 북천하는 것이 장차 남북통일에 대비해서도 훨씬 진취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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