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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7~8월 미국에 '극한' 가뭄이 닥쳤다. 당시 미국 가뭄감시센터는 전체 국토의 63%가 가뭄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는 1999년 가뭄 측정 이후 처음이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세계적 곡창지대인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주의 옥수수 생산이 13%가량 감소했으며 당시 밀 가격은 4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이에 앞선 2008년에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미국 중서부 지역에 10년래 최악의 토네이도가 몰아닥치면서 옥수수·밀·대두 등 농작물이 모조리 휩쓸려 나갔다. 당시에도 이들 곡물의 국제 가격은 공급 부족으로 인해 급등했다. 전세계적인 이상기온으로 가뭄과 태풍·홍수가 번갈아 몰아치면서 농작물 생산량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미국 농민들의 금전적 피해는 크지 않았다. 토네이도로 인한 주택 파손 등의 피해는 피할 수 없었지만 농작물은 미리 가입해둔 보험 덕에 피해의 상당 부분을 만회할 수 있었다.
미국의 농업은 금융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각종 농작물 관련 파생상품이 발달돼 있을 뿐 아니라 각종 자연재해 등에 대비한 보험 역시 활성화돼 있다. 실물경제를 뒷받침한다는 금융 본연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1938년 대공황과 대가뭄으로 인한 피해구제를 목적으로 도입된 미국 농작물보험은 가입률이 80%를 웃돌 정도로 미국 농업인에게 필수 금융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농작물 재해보험의 발전이 처음부터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80여년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실시 초기에는 보험료가 불필요한 '비용'으로 인식된 탓에 가입률이 저조했고 1944년에는 자연재해로 인해 손해율이 치솟자 보험가입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 비보험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 재해지원 프로그램을 재해보험으로 전면 대체하고 보험료의 30%를 정부가 보조하는 내용의 법 개정이 이뤄지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94년에는 보험 가입자에게만 각종 농가지원 프로그램의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면서 보험 가입률이 급상승했다. 그 결과 미국의 대표 작물인 옥수수·면화·밀 등의 재해보험 가입률은 80%를 훌쩍 뛰어넘는다. 사실상 농업을 전업으로 하는 농민 전부가 농작물 재해보험을 이용하는 셈이다.
전세계 곡물 가격을 좌지우지하는 농업국가답게 미국 농작물 재해보험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2013년 기준으로 가입면적은 1억1,967만㏊, 총보험료는 12조원, 국고보조는 약 7조8,000억원에 달한다. 이렇다 보니 민간 보험사들도 상품 개발과 마케팅에 적극 나서고 있다. 19개사가 재해보험을 판매하며 상품도 다양하다. 주요 작물의 가입률이 20~30%에 불과하고 취급 보험사와 상품도 1종에 불과한 우리나라와는 천양지차다. 자연재해가 닥쳤을 때 생계보조에 불과한 재난지원금에 의존하는 우리나라 대다수 농민들과 달리 미국 농민들은 보험 가입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미국 농민들은 자연재해를 신경 쓰지 않고 작물 재배에만 몰두할 수 있다. 오히려 자연재해가 오면 보험사들이 전전긍긍하는 구조"라며 "농업과 금융이 상호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함께 발전한 모범사례"라고 말했다.
실제 2012년 미국 전역을 휩쓴 가뭄으로 농작물 재해보험의 손해율은 157%에 달했다. 미국 3대 농작물인 옥수수·대두·밀의 손해율은 174%에 이르렀다. 거둬들인 보험금보다 지급한 보험료가 더 많아 보험사들이 대규모 손실을 입은 반면 농민들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만회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유럽에서 농작물 재해보험이 발달한 국가로는 스페인을 꼽을 수 있다. 1978년 재해보험을 도입한 스페인은 농작물 17개, 가축 5종 등 총 24종류의 보험상품을 운영하고 있다. 보험 가입률(2011년 기준)은 농작물 32%, 가축 51.9%로 20%에 못 미치는 우리나라보다 높다. 보험료에 대한 국고보조율은 약 50% 정도로 우리나라와 유사하지만 농민들의 보험 선호도는 더 큰 셈이다.
금융 후진국인 중국도 농작물 보험만큼은 선진국 못지않다. 1982년 도입된 중국 재해보험은 2003년 정부의 보험료 보조 제도가 시행되면서 급속하게 발전됐다. 이후 매년 20~30%의 성장률을 보이며 2012년에는 전체 보험료가 22억달러(2조3,450억원)에 달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농작물 보험시장으로 성장했다. 벼·옥수수·밀·콩·면화·설탕 고무 등이 주 가입대상이며 약 2억가구가 재해보험에 가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중국뿐 아니라 베트남 등 후진국들도 재해보험 규모나 가입률 측면에서 우리나라보다 앞서고 있다"며 "재해보험 확대는 농업 경영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보험산업을 발전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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