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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들불처럼 번진 1919년 3월1일. 조선총독부는 조선 유일의 선물거래소인 인천미두취인소의 매매를 무기한 중지시켰다.
미두취인소가 자본금 4만5,000원의 40배가 넘는 187만5,818원의 결제불이행 사고를 냈기 때문이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특수 등으로 당시 일본 경제가 대호황을 누리면서 쌀값이 들썩인 것이 주원인이다. 2년여간 10원을 중심으로 등락이 없던 쌀값은 1917년 봄부터 급등세를 타기 시작, 연말에는 5년 전의 사상 최고치였던 20원을 돌파한 데 이어 이듬해 8월에는 30원마저 돌파했다.
1차 대전이 종료되자 1919년 초 취인소의 대주주이자 미두업자인 황목조태랑(荒木助太·아라키·60)은 40원 돌파를 예상하고 매수를 지속했다. 그러나 2월 들어 쌀값은 돌연 하락세로 반전되더니 3·1운동으로 인해 폭락세를 보였다. 위기에 몰린 아라키는 취인소 사장 반전무등웅(飯田茂登雄· 45), 일본18은행 지배인 삼상길(森常吉·50)과 결탁해 현찰 대신 소절수(수표)를 증거금으로 예치하고 선물가격의 하락세를 저지하기 위해 매수주문을 더 냈다. 이에 따라 아라키의 기미선한(期米先限·3개월물) 포지션은 10만석에 달했으며 3월 들어 시세가 30원대 초반까지 폭락하자 결국 결제불이행 사태가 벌어졌다.
취인소는 사내 유보금 67만원으로 아라키의 부도금액 187만원의 일부를 결제했으나 120만원은 메워 넣을 방법이 없었다. 총독부는 거래를 중단시키고 100만원의 대폭 증자를 지시했다. 80%의 프리미엄이 붙은 신주는 전국의 정미업자들에게 강제 할당됐다. 이렇게 마련된 주식발행초과금 40만원과 조선식산은행 차입금 69만원 등으로 2개월에 걸쳐 변제가 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채권 회수액은 고작 8만7,000원에 불과했다. 당시 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부정 소절수가 7만장이 넘어 조사에만 1년이 걸렸으며 사건발생 2년 후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에서 19명 중 16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최근 한맥투자증권의 주문실수 사고로 인해 자본금 198억원의 두배가 넘는 460억원의 결제불이행 사태가 발생했다. 7만장의 소절수 허수주문과 3만6,000건의 전산주문실수의 차이만 있을 뿐 94년 전 인천의 미두시장에서 발생했던 미두중매점 결제불이행 사태가 반복된 것이다. 소는 잃었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사후증거금 제도의 취약점 보완과 거래소의 '일괄 주문취소(킬 스위치)' 기능을 서둘러 도입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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