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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를 겪은 사람들] 강경식 前부총리


[IMF를 겪은 사람들] 강경식 前부총리 "97년초 한보 부도때 경제 이미 파산"파산상태 아니었으면 부총리직 수락안해임부총리가 "IMF안가겠다" 번복, 일꼬여초고금리정책 수용 지금도 안타까워현정부 국가재정 너무 가볍게 취급경제위기 다시 올까 걱정되는것은 사실"분배는 성장통해 가능한 것" 알아야 대담=이용웅 경제부장 yyong@sed.co.kr 정리=이종배기자 ljb@sed.co.kr 사진=이호재기자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는 물론 우리 국민의 삶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IMF 위기 순간순간을 지켜보고 책임졌던 고위층 주역들은 물론 삶의 현장에서 환란위기를 온몸으로 체험해야 했던 일반 국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순차적으로 소개한다. “지난 97년초 한보 부도가 났을 때 이미 경제가 파산됐다고 생각했다. 파산상태가 아니었다면 부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서는 ‘한국 경제는 이미 망했는데 뭐하러 들어가냐’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직 신현확 전 총리만 그 자리를 맡으라고 고언을 해줬다.” 문민정부 여섯번째 경제부총리로 외환위기 중심에서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강경식(70ㆍ사진) 전 부총리. 10년의 세월이 흘러 고희에 접어든 강 전 부충리가 실로 오래간만에 말문을 열었다. 그가 부총리로 재직한 때는 97년 3월5일부터 11월19일까지 9개월여. 그후 27차례의 걸친 외환위기 재판에서 검찰의 기소가 대부분 무죄로 판결났지만 그는 97년 외환위기가 거론될 때마다 항상 논란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강남 테헤란로 동부그룹 고문실에서 만난 그는 “굳이 변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면서도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만 뒤집어 씌우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도 분명하게 밝혔다. 인터뷰는 아무래도 IMF 당시만 이야기하기에는 지루한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요즘 돌아가는 경제사정에 대한 의견도 물었고 과거 70~80년대의 경제사정에 대해서도 질의응답이 오갔다. 특히 IMF 10년을 맞아 ‘경제위기가 재현되는 게 아니냐’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 강 전 부총리는 “재정문제를 너무 가볍게 취급하는 것 같아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DJ 정부가 환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데는 “건전한 국가재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진단한 그는 “요즘 나라 돈을 임자 없는 돈처럼 겁 없이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장을 통해 (분배가) 가능한 거지 정부가 돈을 나눠줘서 (국민이) 사는 것은 아니다”며 참여정부의 ‘분배 우위 정책’에 대해 우회적으로 평가했다. -위기의 시그널이 있었을 텐데. ▦97년초 한보가 부도났을 때 이미 경제가 파산됐다고 생각했다. 파산상태가 아니었다면 부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상황을 한번 봐라. 96년에 이미 경상수지 적자가 240억달러에 달하지 않았나. 나라 경제는 이미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OECD(96년)에 가입하면서 자본시장을 장기채권시장은 오픈하지 않고 단기시장만 오픈한 것이 화근이었다. 종금사들이 홍콩에 가서 단기로 돈을 빌려 장기로 대출하는 등 돈 장사가 횡행했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취한 정책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당시는 대선 정국이었지만 과감하게 정부 세출 예산도 삭감했다. 국제수지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긴축재정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비를 억제하는 긴축을 추진하면서 국제수지 적자가 월별로 줄어드는 게 확연히 눈에 띄었다. 그런 조치를 취하고 나니까 외환보유고도 300억달러로 올라가고 금융시장도 안정화됐다. 그러다가 덜커덕 터진 것이 국내에서는 기아 사태였고 해외에서는 태국 금융위기였다. 대책은 외국에서 추가로 돈을 빌려오고 이미 빌린 돈은 회수하는 것을 늦춰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위기를 막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소개한다면. ▦부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자산관리공사 법을 만들었다. 부실채권 처리를 위해서는 시장경제 원칙대로 처리해야 하고 자산관리공사 도입이 필요했다. 4월인가 5월에 국회에서 법이 통과됐다. 또 청와대에서 금융기획협의회가 만들어졌다. 문제는 감독체계였다. 한보가 도대체 돈을 얼마나 빌렸는지 당사자인 한보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증권감독원 따로 있고, 은행감독원 따로 있고 도저히 파악이 안되는 구조였다. 한 지붕 안에 넣어 금융감독체계를 강화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경제가 좋지 않으니 아무래도 실업이 걱정됐다. 벤처기업 육성과 해외투자 유치를 위한 지방중심 발전전략을 수립했다. 이런 것들이 당시에도 법안으로 만들어졌지만 결국 IMF가 올 때까지 통과되지 않았고 그 이후에 통과됐다. 훗날 환란 극복과정에서 이들 법안을 가지고 (부실 금융기관을) 정리했다. -IMF행은 언제쯤 실감했는지. ▦(97년) 7월 태국에서 위기가 발생했을 때 위기감이 있었지만 그럭저럭 버티다가 11월에는 (우리도) IMF에 가지 않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월에 IMF 관계자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외환위기) 낌새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것이 동남아 금융위기가 10월 싱가포르를 거쳐서 홍콩까지 오니까 바로 영향이 왔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수단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11월16일 캉드쉬(IMF 총재)를 비밀리에 불러 300억달러 지원에 합의했다. -IMF 고금리 정책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 . IMF는 서포트만 하기로 했다. 왜 초긴축정책을 받아들였는지 (지금도) 아쉽다. 우리나라는 자본시장 오픈이 덜 돼 있었다. 즉 채권시장이 오픈이 안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초고금리를 한다고 해서 외국에서 돈이 들어오겠나. 오히려 금리가 올라가면 증권시장이 죽는다. 증권시장을 죽이는 것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돈을 쫓아내는 것과 같은데 왜 그런 정책을 했는지….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내 후임자(임창렬 부총리)가 IMF 안 가겠다고 한 것 때문이 아닌가. 이미 합의가 끝난 이야기를 개각이 이뤄지면서 (IMF) 안 가겠다고 하니까 (그 쪽의) 신뢰를 잃었고 그 다음부터는 엄청 어려웠다. 실제 11월에는 300억달러도 필요 없었다. 넉넉하게 300억달러로 잡은 것이다. 감독을 제대로 하면 외환위기 사태가 날 수 없다. 부총리직을 수락한 배경에는 내가 꿈꿔왔던 정책을 실천해야 한다는 신념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재경원 안에서도 권한을 포기하는 것이다 보니 반대가 많았다. 한국은행도 데모로 일관했다. 경제빅뱅 중심에 그가 있었다"시장주의경제 시발점" 79년 '4·17조치' 주도97년엔 "환란초래 장본인" 불명예 꼬리표 달아 "한국 경제의 빅뱅을 가져온 사건으로 흔히 외환위기를 꼽지만 사실을 따져보면 그보다 훨씬 이전인 지난 79년 '4ㆍ17 경제안정화종합시책'에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는 정부 통제 경제정책을 시장자유화라는 큰 틀로 재편한 게 바로 '4ㆍ17조치'이기 때문이지요. 중동 붐으로 목돈을 거머쥔 사람들이 땅을 사고 아파트를 사면서 부동산값이 급등했는데 분양가는 시장가의 거의 4분의1 수준으로 꼭꼭 묶여 있는 상황이라 분양만 받으면 대박을 터뜨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시장가격과 정부 고시가격이 서로 엇갈려 경제가 소화불량의 상황에 몰려 있을 때 나온 조치가 바로 시장주의를 중시하는 4ㆍ17조치이고 그것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빅뱅을 가져온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4ㆍ17조치 당시 경제기획원에 근무했던 박병원 재정경제부 차관의 말이다.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도 "4ㆍ17조치는 개발시대의 변형된 계획경제가 시장경제로 탈바꿈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4ㆍ17조치를 진두 지휘하고 실천에 옮긴 책임자가 바로 강경식 전 부총리였다. 당시 경제기획원 차관보에 재직했던 강 전 부총리는 1년 이상 이 문제에 매달리면서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만들어낸 것.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무던히 애를 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4ㆍ17조치는 금융통화 긴축은 물론 그동안 거론조차 못할 정도로 터부시했던 수출지원의 축소, 중화학 투자의 조정, 농촌주택개량사업의 축소까지 다루는 범위가 무척 광범위했고 인위적으로 묶여 있는 물가구조를 정상화하는 등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한국 경제가 정부 주도 경제에서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이 "물가안정을 포기하자는 말이냐"며 강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시장자율을 강조하는 4ㆍ17조치는 오히려 전두환 정권 당시 '놀라울 정도의 물가안정'을 달성하는 데 초석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4ㆍ17조치는 2차 오일쇼크와 맞물려 시장을 엄청나게 흔들어대며 부마 사태와 10ㆍ26이라는 대형 정치사건이 일어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함께 받고 있다. (4ㆍ1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시리즈 진행 중 추후 소개할 예정이다.) 5공 때 재무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던 강 전 부총리는 관료사회를 떠나고 한참 뒤 다시 한번 한국 경제의 빅뱅을 경험하는 아이러니를 겪게 된다. 외환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97년 3월 "달리 길이 없을 것 같다"는 YS의 부탁을 받고 경제부총리직을 맡은 뒤 9개월 만인 11월19일 그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단군 이래 최대 위기라는 일대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그가 서 있었다. 역사의 반전일까. 4ㆍ17시책으로 경제관료로서 명성을 날렸던 그는 97년에서는 '환란을 초래한 장본인'이라는 불명예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수인번호 '1199'번의 신분으로 1.1평의 독실에서 보석으로 풀려나기 전까지 109일간의 구치소 생활도 경험했다. 아직도 그에게는 '환란의 주역'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고 있다. 그를 변명해주는 사람보다는 원망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고 환란 당시 경제위기를 처리해가던 그가 몇 가지 결정적 오류를 범한 것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강경식 전 부총리. 어쨌든 그는 한국 경제의 1ㆍ2차 빅뱅의 중심에서 현장을 지휘했던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다. ◇약력 ▦36년 출생 ▦61년 서울대 법대 졸업 ▦73~82년 경제기획원 물가국장ㆍ기획국장ㆍ예산국장ㆍ기획차관보 ▦82년 1월~83년 10월 재무부 차관ㆍ장관 ▦83년 10월~85년 1월 대통령 비서실장 ▦12ㆍ14대 국회의원 ▦97년 3월~97년 11월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15대 국회의원 ▦현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이사장 및 동부그룹 고문 입력시간 : 2006/12/17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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