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진출 과정에서 우리나라 은행들도 차별화가 필요합니다. 진출하는 지역, 영업 모델, 고객까지 똑같으면 국내 시장에서의 레드오션이 해외에서도 금방 재연됩니다. 각자의 핵심 역량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 어떤 쪽에 집중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씨티은행을 이끌었던 국내 최장수 은행장이자 금융계 최고경영자(CEO) 출신 가운데 가장 국제적 감각을 갖춘 인물로 평가되는 하영구(사진) 은행연합회 회장은 "우리나라 은행들의 해외진출이 너무 겹치고 있다"며 획일적인 해외진출을 피하고 금융회사가 해외에 나가서도 잘할 수 있는 각자의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에 특정 국가에 똑같은 모델로 한꺼번에 진출하는 국내 은행들의 해외진출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금융회사가 해외에서 '인수합병(M&A)'을 노린다면 국내 시장에서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국내 시장에서 금융회사가 지금처럼 수익성이 낮고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해외에서 좋은 매물을 싼값에 사기는 어렵다. 결국 정부의 바람대로 금융회사가 해외에서 적극적으로 뛰고 수익을 창출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규제완화를 통해 금융회사의 국내 수익성을 높이고 적극적인 배당정책을 통해 기업의 가치를 제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별화 못하면 해외 시장도 '레드오션'=하 회장은 국내 금융시장의 수익성 자체가 워낙 낮기 때문에 자본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수익성이 높은 지역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는 적극 공감했다. 그러나 하 회장은 장기적인 시각으로 계획을 세워 해외에 나가야 하며, 특히 획일적인 진출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외환위기 이전에 우리나라는 제2금융권까지도 다 해외진출을 했습니다. 당시에 은행도, 종금사도 동남아 국가에 진출해 이자가 높은 채권만 사들였습니다. 수익은 빨리 나왔지만 리스크 관리는 제대로 안 됐고 고객 중심의 비즈니스 기반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런 식의 해외진출은 결국 성공할 수 없습니다."
중국 시장에서 국내 금융회사들의 수익성이 떨어지는 것 역시 차별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게 하 회장의 분석이다. 그는 "중국 시장에서 (국내 은행들이)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 중심으로만 영업을 하다 보니 수익성이 크게 떨어졌다"며 "그런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확하게 어느 지역을 타깃으로 할지, 어떤 비즈니스 모델을 가져갈지 결정을 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 회장은 KB금융을 예로 들며 "KB금융의 경우 소매금융이나 가계대출 부문의 역량을 살려 이와 관련된 캐피털 회사나 신용카드 사업을 해외에서 먼저 해보고 그다음에 은행으로 진출하는 모델도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모든 은행이 해외에 나가 한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똑같은 기업금융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내선 수익성 회복 힘들어 해외진출은 불가피=하 회장은 또 국내 은행의 해외진출이 불가피한 이유로는 국내에서 금리가 올라가도 은행의 수익성이 쉽게 회복되기는 힘들다는 점을 들었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은행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이 확 떨어졌다가 그 뒤로 지속적으로 올라 2004~2006년이 상당히 호시절이었습니다. 2004년에 씨티가 한미은행을 인수하고, 2005년에 SC가 제일은행을 인수하고, 2006년에 HSBC가 외환은행을 인수하려고 했던 것도 국내 금융시장의 수익성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다시 지속적으로 수익성이 떨어졌습니다. 저금리 시대는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왔지만 이미 그전부터 국내 은행의 수익성은 내리막을 가고 있었던 겁니다. 해외진출은 그런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 일본 은행은 정책금리가 제로금리 수준인데도 국내 은행보다 ROE와 주가순자산비율(PBR)이 오히려 더 높다. 이들 은행은 저금리를 이겨낼 수 있는 수익 방어책을 상당 부분 해외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점점 강화되는 글로벌 자본규제와 소비자 보호 조치 등은 은행의 수익성을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우려된다. 하 회장은 "긴 호흡을 갖고 해외진출 전략을 짜고 글로벌 인재를 키워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가치 높여야 해외 M&A도 성공=하 회장은 최근 해외진출이 가장 활발하고 베트남 등에서 현지화에 성공한 신한금융지주의 힘은 탄탄한 지배구조와 상대적으로 높은 국내 수익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진단했다. 결국 국내에서 안정된 수익성을 갖춰야 효율적인 해외진출 전략을 짤 수 있다는 것이다.
"해외진출의 스케일을 넓히려면 결국 M&A를 해야 하는데 M&A가 성공하려면 우리나라 통화가 강세이고 우리나라 금융회사의 가치가 높게 평가 받을 때 그것을 바탕으로 해외에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금융회사를 인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내 가치가 낮으면 결국 굉장히 비싼 가격을 주고 매물을 사올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금융회사들의 수익성과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규제완화와 적극적인 배당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하 회장의 진단이다. 그는 "전 세계 평균 배당성향이 51%인데 우리나라는 15.7% 수준밖에 안 된다"며 배당을 통해 기업의 가치를 높이고 이를 기반으로 해외에 진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 회장은 이와 더불어 언어 문제 등 국내 금융회사들이 해외 현지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숙제들은 결국 글로벌 인재 육성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현지에서 영어를 할 수 있는 우수한 직원들을 뽑고, 현지에 보내는 국내 직원들도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인재들을 발탁해야 한다"며 "중장기적으로는 씨티그룹처럼 그 나라의 인재를 CEO에 앉히고 경영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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