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우리 기업들은 해외 기업들의 인수합병(M&A) 대상이었다. 그것도 맛이 꽤 달콤한 먹잇감이었다. 많은 차익을 남겨줬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도 해외에 나가 간혹 M&A를 성사시켰지만 기껏해야 삼성전자나 포스코 등 대기업의 몫이었다.
그러던 M&A의 판도가 바뀌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이 침체에 빠지자 공기업이 M&A에 나서고 금융회사들도 해외 인수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지난해부터 서서히 불던 M&A 바람은 새해 들어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당장 살기에 바빴던 중소기업까지 해외 유망기업 인수를 위해 M&A 전략을 펼치고 있다. 바야흐로 'M&A코리아'의 양상이 확산되고 있다.
11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인천공항공사는 JP모건 등과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이용객이 가장 많은 에든버러공항 인수전 뛰어든다. 인천공항은 일단 이 공항의 지분을 3%가량 인수하기 위해 전략을 짜고 있지만 선진국 공항을 입질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금융회사 가운데는 우리금융지주가 새해 벽두부터 신호음을 울렸다. 무려 3개의 해외 기관이 타깃이다. 동남아에서 추진하는 두 곳 중 한 곳은 잘하면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순간이 올 듯하다.
중소기업은 확인된 것만도 14곳이나 되는 기업이 해외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실적이 좋아진 중소기업들이 새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유럽 등 선진국 전자ㆍ부품업체 인수를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소기업들은 KOTRA의 '글로벌파트너리팀'을 활용, 기술력이 앞선 유럽이나 미국 기계ㆍ전자부품 기업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3개 기업은 M&A가 상당히 진척돼 최종 인수를 앞두고 있다. 염승만 KOTRA 차장은 "매물로 나온 기업 규모는 1,000억원 내외인데 M&A가 성사되면 기술은 물론 판매망까지 확보할 수 있어 새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매입도 활발하다. 한국투자공사(KIC)가 런던 소재 빌딩을 1,346억원에 인수했고 앞서 국민연금은 지난해 5월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230 파크애비뉴' 빌딩의 지분(49%, 2,200억원)을 매입했다. 교직원공제회는 시카고에 있는 3유퍼스트내셔널플라자를 4,000억원에 사들였다.
국내 기업이 인수합병(M&A) 대상을 찾기 위해 본격적으로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다.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의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로 전이되면서 기술력을 갖춘 기업들의 경영상황이 악화되자 기술력과 판로개척을 위해 해외기업 M&A에 나선 것이다. 자본시장연구원 관계자는 "쏠쏠한 M&A 대상이던 한국 기업이 이제는 반대로 해외 M&A에 나서는 등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이나 기관에 대한 인수요청도 늘고 있다. 자산운용업체의 한 관계자는 "솔직히 삼성전자 등 일부 대기업을 빼놓고는 외국 IB들이 국내 기업에 기업을 인수해달라는 요청은 거의 없었던 게 현실이었다"면서 "하지만 2008년 이후 상황은 바뀌어 글로벌 IB들이 외국매물을 들고 와서 매수 제안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국내 기업의 M&A 규모는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실제 외국기업 M&A는 2009년 68억달러에서 2010년 119억달러로 급증한 뒤 지난해 10월까지 그 규모가 112억달러에 달한다. 2010년 기준 국가별 해외 M&A 규모도 세계 10위를 기록했다. 한국 기업에 대한 시각이 그만큼 달라지고 있다는 얘기다.
대기업의 전유물이었던 해외 기업 M&A는 외연이 상당히 넓어지고 있다. 또 M&A 대상도 과거에는 자원확보와 중국 등 기타 아시아시장 진출을 위한 것이었지만 근래 들어서는 미국이나 유럽 유명 브랜드 업체나 독자 제조기술을 가진 업체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예컨대 두산중공업의 유럽 자회사인 두산파워시스템은 지난해 말 독일의 발전설비업체인 'AE & E렌체스'를 인수했다. 제일모직도 악어백 브랜드인 이탈리아의 '콜롬보 비아 델라 스피가'의 지분 100%를 사들였다. 이에 앞서 휠라코리아가 '타이틀리스트' '풋조이' 등의 브랜드를 보유한 미국 골프용품업체 '아큐시네트'를 인수해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연ㆍ기금도 기업과 협력해 국외 M&A를 계획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부터 삼성물산ㆍSKㆍGS 등 6개 대기업과 사모투자펀드(PEF)를 조성해 국외 통신, 플랜트 건설사업 등에 투자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원래 투자계획은 1조원가량이었지만 4조원까지 늘어났다. 1대1 매칭펀드 형태로 대기업 투자분까지 합하면 8조원 규모다.
중소기업도 해외기업 M&A에 적극적인데 기술력이 앞선 미국이나 유럽의 기계ㆍ전자부품 M&A를 추진하고 있다. KOTRA 관계자는 "국내 중소기업은 그동안 해외 유수 기업들과의 기술협력 등에 주력해왔는데 지난해부터는 전략을 바꿔 아예 M&A를 시도하고 있다"면서 "계획대로 된다면 조만간 중소기업의 해외 기업 M&A 성공도 잇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과 미국의 기술력을 갖춘 기업들이 매물로 나오고 아시아국가의 M&A 추진이 급증하면서 국경 간 M&A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박용린 자본시장연구원 정책ㆍ제도실장은 "전세계 기업들의 순현금 흐름을 살펴보면 세계 M&A 시장은 호황기의 진입 국면에 근접했다"면서 "더구나 인수자 입장에서 보면 기업의 수익성과 가치평가 수준 등 M&A 매력도가 높아져 선제적으로 인수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금력을 바탕으로 국외 진출을 노리려면 지금이 적기라는 것이다.
실제로 금융위기 이후 2009년 1조7,645억달러까지 감소했던 전세계 M&A 시장 규모는 2010년 2조2,000억원 규모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10월 말까지 2조1,219억달러에 달했다. 또 국경 간 M&A가 전체 인수합병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 27.6%에서 2010년 39.1%로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