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업체들의 줄지은 영업정지 이후 저축은행들은 건전성의 족쇄에 묶여 수년 동안 활로를 찾지 못해왔다. 먹거리를 찾지 못해 이대로 가다가는 '고사'할지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돌았다.
하지만 최근 상황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묵은 부실을 털어내고 재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정부도 건전성만을 내세우던 데서 벗어나 '생존'을 위한 도구들을 조금씩 꺼내고 있다. 연초 화두로 내건 '관계형 금융'이 그 단초였다. 잇따른 금융당국의 저축은행 육성 방침에 다른 금융권에서 '저축은행만 챙기는 거냐'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당장 지난달 당국이 '여신전문금융업법 감독규정 개정안'을 내놓자 시선이 쏠린 곳은 여신전문금융회사가 아닌 저축은행이었다. 할부금융과 리스·개인신용대출 등 다양한 업무를 해온 캐피털사를 기업금융 위주로 재편하고 개인신용대출 수요를 저축은행으로 유도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업체 고객신용정보를 은행연합회에 넘기도록 한 것에 대해서도 결과적으로 저축은행의 고객층만 넓어진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금리대 상품 출시 압박과 1금융권 수준의 건전성 기준 준수, 대출규제가 1금융권에 유리하게 완화된 점 등 환경이 녹록지 않은데다 OK와 웰컴·친애 등 대부업체 출신 대형 저축은행들이 탄생하면서 경쟁도 더욱 치열해지는 분위기다.
◇저신용자 신용대출과 건전성, 두 마리 토끼=관계형 금융, 나아가 서민금융은 1금융권을 이용하기 어려운 저신용자를 위한 금융이다. 필요하지만 리스크가 크고 비용 또한 높다. 그런데 요구되는 것은 중금리, 건전성은 은행과 맞먹는 수준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뛰어가는 두 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으라고 하는 셈이다.
실제로 지난 2000년대 초반 감독 강화에 따라 건전성 분류기준 도입과 대손충당금 기준이 강화돼 대출비용이 증가한 이래 지속적으로 건전성 규제 강화가 이뤄져왔다.
당장 7월부터 대형사 기준 경영개선 권고기준이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6%에서 7%로 높아졌다. 저축은행과 카드사·신협 등은 대손충당금 적립 기준이 강화돼 은행 수준으로 충당금을 쌓아야 한다.
같은 조건이라도 저축은행을 찾는 고객의 신용도가 1금융권보다 낮아 충당금이 많다. 부실징후 거래처로 평가된 업체의 경우 원금과 이자를 꼬박꼬박 내도 요주의 거래처로 분류돼 정상 거래처의 10배인 2%의 충당금을 쌓아야 한다.
이런 탓에 개인사업자대출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2012년 6월 7조2,000억원이던 개인사업자대출은 올 6월 5조3,000억원으로 감소했다.
신협의 소액신용대출도 2000년대 초반 전체 대출금의 절반 수준을 유지하다가 지금은 9%대에 머무르고 있다. 업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절차와 규정에 맞게 대출하고 전체 건전성도 맞췄는데 부실대출이 큰 게 생기면 지적을 받는다"며 "관계형 금융은 신용평가에 정성평가를 더해 신용대출을 해준다는 것인데 기준도 모호한 정성평가로 대출을 해줬다가 부실이 늘어나면 뒷감당은 누가 하느냐"고 반문했다.
이윤수 금융위원회 중소금융과장은 "자영업이나 기업은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원금과 이자 상환 내용만 보고 정상 거래처로 평가해주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며 "다만 관계형 금융 활성화를 위해 건전성 기준 완화 방안을 이달 중 발표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그래도 관계형 금융이 살 길…절치부심하는 저축은행=4월에는 저축은행 20여곳이 참석한 가운데 관계형 금융의 모범 사례인 진주저축은행의 일수 대출 내용을 공유하는 세미나가 진행됐다. 한 분야에서라도 전문성을 쌓아 돌파구를 찾아보자는 움직임도 있다. 개인신용대출 전문이었던 HK저축은행이 크레인 등의 중장비를 담보로 장비구매와 운용자금을 대출해주는 '산업장비담보대출'을 선보였고 모아저축은행은 교회를 타깃으로 건축자금과 운영자금용으로 교회 건물과 사업부지를 담보로 대출해주는 '호산나대출'을 운영하고 있다. 기준은 정통교단 소속 교회일 것, 출석 신도 수 100인 이상일 것, 창립 3년 이상인 곳일 것 등 교회 맞춤형으로 짰다. 이 외에도 메디컬론과 모아운송사업자대출·요양원대출 등 특화된 대출 상품을 갖추고 있다.
한국투자저축은행은 건축자금지원대출과 숙박시설지원자금대출 등을 운영한다. 건축자금지원대출의 경우 현장에 나가 공사 과정을 일일이 체크하고 공사 과정에 맞춰 비용을 지급하는 식으로 운영하며 숙박시설지원자금대출은 장부 등 차주의 증빙자료에 대한 신뢰성을 검증하는 자신들만의 노하우를 활용해 대출해준다.
담보대출에만 주력해온 저축은행들까지 자체 신용평가시스템(CSS) 개발에 착수하거나 실제 시범적인 신용대출에 나선 곳도 있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대형사를 제외하면 자체적으로 심사 능력과 인력을 갖춘 곳이 별로 없다"며 "중앙회가 개발한 신용평가시스템이 있지만 저축은행은 지역별 특색이 강해 일괄적인 평가시스템을 적용하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관계형 금융을 해도 무엇을 보고 차주의 상환 능력을 평가할지에 대한 고민도 있다. 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1금융권의 경우 주거래은행이라는 개념이 있어 기업의 자금흐름 파악이 쉽지만 저축은행은 단기거래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평가에 활용할 근거가 빈약하다"고 말했다.
이재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해외의 경우 대출자가 사업자이면 사업 설명을 듣고 주택담보대출은 해당 주택의 설계도면은 물론 주변 경관 사진까지 참고해 대출해주는 정성적 평가를 중시하고 있다"며 "관계형 금융 활성화를 위해서는 관련 규제 완화와 함께 저축은행 스스로 관계형 금융에 적합한 대출 전문가를 육성해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열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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