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얼마 전 교통사고로 딸을 잃은 주부 김명희(40)씨는 매일 딸의 미니홈피를 방문하는 일이 일상이 됐다. 생전에 딸이 올린 사진이나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나마 슬픔을 달랠 수 있어서다. 김씨는 딸의 과거를 더 추억하고 싶은 마음에 비공개로 설정해둔 사진첩과 일기장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해당 업체에 요청했지만 본인이 아니어서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2. 회사원 최영채(42)씨는 요즘도 아버지의 블로그를 보면 마음이 무겁다. 분재와 수석에 관심이 많던 최씨의 아버지는 한 포털업체의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한때 '인기 블로거'에 선정될 정도로 블로그 운영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하지만 갑작스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블로그도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김씨는 평소 아버지와 친분이 깊었던 이웃 블로거에 블로그 운영권을 이관해달라고 해당 업체에 문의했지만 규정에 없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생전에 고인이 이용하던 인터넷 블로그나 미니홈피 등 '디지털 유산'을 가족이나 지인이 상속하는 법안이 이르면 연내에 마련된다. 뒤늦게나마 디지털 유산의 개념을 인정하고 이를 합법화한다는 점에서 일단 환영의 목소리가 많지만 상속 대상과 범위가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새누리당 김장실 의원을 비롯한 여야 의원 12명은 최근 디지털 유산을 상속인이 승계할 수 있는 내용의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법안이 발효되면 고인이 생전에 작성하거나 획득한 디지털 유산의 소유권 및 관리권이 마련되고 네이버ㆍ다음ㆍ네이트 등 서비스제공자인 포털업체들도 디지털 유산 처리에 대한 규정을 도입해야 한다.
디지털 유산은 고인이 생전에 이용하던 무형의 디지털 콘텐츠를 일컫는다. 미니홈피ㆍ블로그ㆍ페이스북 등의 게시물ㆍ사진ㆍ동영상ㆍ댓글뿐만 아니라 온라인 게임에서 획득한 게임 아이템이나 사이버머니 등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용자 본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디지털 유산의 소유권과 상속권에 대한 체계적인 법규가 없어 꾸준히 논란이 제기돼왔다. 가족이 대신 고인의 미니홈피를 운영하거나 폐쇄를 요청하더라도 서비스 업체마다 각각 다른 규정을 적용해온 탓이다. 법률적으로도 디지털 유산은 민법에 따라 어느 정도 효력을 갖지만 이를 제3자에게 상속하거나 제공하는 것은 정보통신망법에 위배된다.
국내에서는 디지털 유산 관련 법안이 이제 막 걸음마를 뗐지만 해외에서는 디지털 유산 상속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까지 있을 정도로 사회적인 관심이 높다. 미국에는 레거시로커ㆍ시큐어세이프 등 디지털 유산 관리를 대행해주는 업체가 활발하게 활동 중이고 최근에는 일정 기간 인터넷 접속이 없으면 사전에 정해둔 사람에게 콘텐츠를 전송해주는 데스스위치 같은 서비스도 등장했다. 구글도 올해 3월 일정 기간 이상 구글 계정 접속이 이뤄지지 않으면 해당 이용자의 콘텐츠를 가족이나 친구 등 특정인에게 전달하는 '휴면 계정 관리자' 서비스를 내놓았다.
하지만 디지털 유산 상속에 대한 법률 마련이 임박하면서 상속 범위와 대상이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가족이라 하더라도 고인이 공개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 알려질 수 있고 업무상 취득한 회사 내부정보나 국가기밀이 예기치 않게 공개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인의 계정을 상속하는 문제 역시 고인을 사칭하는 등 각종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있어 미니홈피나 블로그 등 해당 서비스에 사망 사실을 알리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디지털 유산의 상속 못지않게 이를 완전히 삭제할 수 있는 이른바 '잊혀질 권리' 역시 존중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김경환 법무법인 민후 변호사는 "디지털 유산의 상속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고인의 의도에 반해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일이 없도록 법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라며 "국내 포털업체들도 이제는 디지털 유산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디지털 유산에 대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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