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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인생] 30. 6.25가 일깨워 준 가난

어른들이야 매일같이 지치도록 일해도 먹고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하지만 부모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는 유년시절의 가난은 그다지 가슴에 남지 않는다. 어느 정도 세상물정 알아갈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난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나의 유년시절도 궁핍으로 불행했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한 뼘이라도 땅을 일구면 나무를 심을 줄 알았던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 내내 `과일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6.25를 겪으면서부터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화원읍은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전쟁 당시에는 주요 작전지여서 전란 위험이 큰 곳이었다. 낙동강 전투가 시작됐을 때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는데 우리가족 역시 달성군 가창면 소재 정대 골짜기로 피난을 갔다. 피난 길에는 스물 여덟 살 된 막내 삼촌이 헌병에 끌려가 군대를 가게 됐다. 삼촌은 불행히도 그 해 전사를 했는데 공식 전사 통지를 받은 것은 10년이나 지난 후였다. 정대 골짜기로 간 우리 일가는 이미 다른 피난민들이 북적이는 하천 다리 밑으로 들어갔다. 다리를 지붕 삼아 돌을 몇 줄 쌓아올려 네 집이니 내 집이니 어줍잖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비가 많이 내려 하천이 불어나면 염치불구하고 인근 어느 집이든 추녀 밑으로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먹을 것이 없으니 남의 밭에서 콩을 봐도 눈이 번쩍 뜨였는데 사촌 하나가 서리한 설익은 콩을 먹고는 심한 설사를 만나 항문이 빠지는 고생을 했다. 당시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는 지금도 콩은 입에 대지 않는다. 다행히 상황이 호전되어 한 달 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읍내 초등학교에는 미군부대가 들어오고 우리 동네에도 외지 피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도 없었지만 애써 짓는다 한들 눈에 불을 켜지 않으면 굶주린 피난민들 틈에서 남아 나는 것도 없었다. 더구나 농사라는 것은 씨를 뿌리는 시기가 따로 있게 마련인데 적당한 때를 이미 놓쳐 버린 후이니 논밭에 먹을만한 것은 없고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다. 먹을 수 있는 풀은 무엇이든 뜯어 먹었고 소나무 속껍질을 벗긴 송피로 떡을 해먹고 변이 나오지 않아 욕을 본 적도 많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아버지께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결핵이었고 막내둥이로 늘 아버지 곁에 붙어 지내던 나도 감염이 되고 말았다. 집안 형편에 제대로 약을 사먹을 수도 없어 그저 돈 안 드는 민간요법으로 병에 좋다는 나무-풀뿌리를 달여 먹는 게 고작이었다. 아버지의 병이 깊어져 가면서 우리 집은 주위로부터 조금씩 소외되기 시작했고 모여 살던 아버지 형제도 흩어졌다. 내가 열 다섯 살 되던 해에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나 역시 집에 그대로 있다가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판이어서 집에서는 수소문하여 나를 요양원으로 보냈다. 가족과 떨어져 낯선 이들과 함께하는 요양소 생활은 차라리 행운이었다. 시간 맞춰 약을 먹는 것은 물론 배려된 식사도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 안에 중학교 과정의 학원이 있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중학교 과정을 이수했는데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 모두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동병상련의 처지여서 다들 진지하고 열심이었다. 2년 만에 병이 나아 집으로 돌아왔다. 큰형은 대구 시내 양복점에 취직해 있었고 작은형은 집안 농사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나는 소 꼴을 베거나 지게를 지고 땔나무를 하러 다녔다. 전쟁 중에 산불도 나고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 집 뒤의 울창하던 숲은 오간 데 없어져 땔나무를 하기도 쉽지 않았다. 뒷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읍내 쪽을 보고 앉았노라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랫마을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한없이 부러운 마음이 들었고, 나도 모르게 언젠가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슴속에 새겨 나갔다. 아시아태평양출판협회장ㆍ예림 경기식물원이사장ㆍ전(前)대한출판문화협회장 <나춘호 예림당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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