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말한 바 있거니와 백92는 만용이었다. 95자리에 잇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만용 같은 수를 최철한이 태연히 두자 구리가 심리적인 동요에 빠졌다. 구리는 고민하다가 93으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이 후퇴는 일대 망발이었다. 다음에 전개된 상황이 그것을 말해준다. 백98에 흑99의 응수는 불가피하다. 여기까지의 진행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흑93이 전혀 불필요한 수라는 것이 쉽게 드러난다. 모양 자체도 빈삼각이고 빈삼각 가운데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삿갓형의 더블 빈삼각이다. 원래 흑93은 99의 자리에 받았어야 했다. 그때 백이 94의 자리에 두면 95의 자리에 끊는 것으로 일단락이었다. 그 수순을 두지 못한 것은 구리의 수읽기에 혼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리는 참고도1의 백2로 버티는 수를 겁냈던 모양이지만 그것은 백이 망하는 길이었다. 흑9가 묘수로 수상전이 벌어져도 백이 잡힌다. 참고도1의 백10으로 참고도2의 백1에 두면 흑 5점은 잡힌다. 그러나 흑2 이하 8로 좌하귀가 몽땅 흑진으로 화하므로 바둑은 흑의 대승으로 끝날 것이다. 이 수순을 구리가 제대로 읽지 못한 덕택에 최철한은 위기를 벗어났다. “흑이 좀 망발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백의 형세가 좋아진 건 아닙니다.” 김수장의 해설. 아직은 흑의 ‘선착의 효’가 살아 있는 바둑이라는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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