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미국 등 선진국보다 파견·하도급 엄격히 규제
현대차, 부품업체 200곳에 "공장 외부로 이전" 요청도
조선·철강 등 파장 더 커 "정부가 교통정리 해줘야"
"울산 공장 안에서 일하는 탁송업체와 부품 협력업체 직원들까지 모두 현대자동차 정규직원으로 발령내야 할 처지입니다."
정부가 파견과 사내하도급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만들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산업계의 혼란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지난 9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현대차 소속 근로자 1,180명을 원청업체인 현대차의 근로자라고 판결하면서 생산관리나 보전처럼 간접 생산공정에서 일하는 근로자에 대해 모두 불법파견이라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법원의 판단대로라면 현대차뿐만 아니라 조선·철강 등 다른 업종의 모든 하도급 직원들도 원청업체의 근로자로 인정,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특히 업계에서는 간접 생산공정 직원까지 불법파견으로 본 데 더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지금까지 생각하지도 않았던 부분으로 인건비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는 탓이다. 제조업을 비롯해 상당수 업종에서 파견이 법으로 막혀 있는 상황에서 법원 판결대로 간접 생산공정에서 일하는 협력업체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채용하면 인건비 급증에 따른 경쟁력 약화와 투자위축이 불가피할 것으로 우려된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정부가 파견과 사내하도급에 대한 구분기준을 명확히 하고 규제 수준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사내하도급과 관련한 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표명을 통해 기업들의 혼란과 불안감을 불식시켜줘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선진국과 달리 파견 법으로 금지=재계에서는 사내하도급 문제가 불거진 근본 원인을 과도한 노동규제에서 찾는다. 우리나라는 파견근로가 가장 엄격한 나라 중의 하나다.
간접고용은 파견과 하도급으로 구별되는데 둘 다 외부 직원을 쓴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업무지시를 하청업체에서 받으면 하도급이고 실제 일하는 사용업체(원청)에서 받으면 파견이다.
우리의 경우 파견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제조업은 파견이 허용되지 않고 전화교환·경비·청소·배달 등 32개 업종에 한해서만 파견이 가능하다. 현대차의 경우 하도급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파견 형태로 협력업체 직원을 썼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이와 달리 우리와 경쟁하는 주요 선진국들은 파견근로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독일과 미국은 파견 허용업무와 파견기간에 제한이 없다. 일본은 제조업까지 파견을 허용하고 있으며 3년이었던 파견근로 허용기간을 2015년부터는 없앨 계획이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만 파견 허용사유를 제한하고 있을 뿐이다.
하도급 규제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비해 센 편이다. 독일과 일본의 경우 사내 하도급과 관련해서는 사적 자치의 원칙을 내세워 법적 규제를 하지 않는다. 미국도 법적 규제가 없다. 프랑스도 기본적으로는 사적 자치의 원칙을 적용하되 위법적인 노동력 거래 시에만 형사처벌을 하도록 돼 있다. 미국·일본·독일 등이 정부 차원의 강력한 제조업 혁신 정책으로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우리나라는 제조업에 파견근로를 금지하고 하도급도 문제시하면서 세계적 추세와 동떨어진 정책을 펴고 있는 셈이다. 파견이 허용되지 않아 하도급을 이용하고 있는데 노동유연성을 일정 부분 담보할 수 있는 하도급마저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판결을 보면 파견법이 하도급 금지법 또는 하도급 규제법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손 놓고 있는 사이 산업계 혼란 가중=재계는 정부가 지금처럼 뒷짐만 지고 있을 게 아니라 중장기적인 차원에서라도 하도급과 파견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와 함께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반적인 규제의 틀을 완화하되 둘 중의 하나는 기업들이 노동유연성 확보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철행 전국경제인연합회 고용노사팀장은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불법파견이 될 수 있는 것도 하도급으로 허용되도록 제도를 바꿔놨다"며 "우리도 정부가 나서서 노동 유연성과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하도급 기준을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법원 판결로 문제가 되고 있는 사내하도급은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교통정리를 해줘야 한다는 요구가 많다. 당장 현대차만 해도 1심 판결대로라면 울산 공장 안에서 부품을 공급하는 부품 협력업체 200여개사의 2,000여명에 달하는 직원들도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하거나 이들 업체를 공장 밖으로 이전시켜야 한다. 여기에 탁송과 단순업무 종사자까지 더하면 해당자가 더욱 늘어나게 된다.
게다가 정보화와 시스템화가 추진되면서 하도급업체와 포괄적인 도급계약을 하고 협력기업 근로자들이 새 기술을 빠르게 습득할 수 있도록 원청업체가 작업표준서를 보급하고 교육시키는 일이 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업무지시 주체를 놓고 하도급과 파견을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현장 상황은 전혀 다르다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실제로 사내하도급을 불법 파견으로 간주한 법원 판결에 따라 현대차뿐 아니라 다른 기업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현대·기아차에서 시작했지만 하도급 비율이 큰 조선이나 철강 등 다른 업종으로 불법파견 문제가 확산되면서 인건비 부담이 크게 늘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 현재 조선업종의 하도급 비율은 61.3%에 달하고 철강도 43.7%에 이른다. 화학(28.8%)과 기계·금속(19.7%) 등 전 산업에 걸쳐 하도급을 이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지난 2011년 정부가 내놓은 사내하도급 근로자 보호 가이드라인 내용 중 일부가 법원판결로 효력을 잃게 된 만큼 기존 지침이 맞는지부터 확인해줘야 기업들이 혼란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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