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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서 여성복은 성공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제일모직의 여성복 브랜드 '구호'의 성공을 이끌었던 디자이너 정구호 전무가 돌연 퇴사했다.
15일 제일모직에 따르면 정구호 여성사업부 전무가 퇴사를 최종 결정하고 당분간 휴식에 들어간다. 지난달 구호 10주년 패션쇼를 끝낸 정 전무는 퇴사를 고심하다 이번주 초 미국 출장을 다녀온 뒤 마음을 굳힌 것으로 전해졌다.
제일모직의 패션사업 부문이 삼성에버랜드에 공식적으로 양도되는 12월1일을 코앞에 둔 시점에 정 전무가 퇴사를 결정하자 업계에서는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 전무는 유명 디자이너로 활약하다 대기업 크리에이티브디렉터로 영입된 첫 사례로 꼽힌다. 정 전무는 뉴욕 파슨스스쿨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활동하다 귀국해 독립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지난 2003년 제일모직이 브랜드 '구호'를 인수하면서 합류했다.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과 뉴욕파슨스 동문인 정 전무는 이 부사장이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 인재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구호 매출을 10년 새 13배(연 900억원)나 키우고 해외에도 진출했으며 르베이지ㆍ에피타프 등 다른 여성복 브랜드 론칭에도 관여했다. 정 전무는 디자이너의 창의력과 대기업의 영업력이 시너지 효과를 낸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 받았다.
정 전무는 "제일모직과 함께 한 시간은 구호의 놀라운 성장과 헥사바이구호의 글로벌 시장 진출 등 패션디자이너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경험을 한 뜻깊은 시간이었다"며 "아티스트로서 이제는 패션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영역에 도전하고 싶어 제일모직에서 떠난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영화 '정사'를 시작으로 '스캔들' '황진이' 등 영화 아트디렉터로서 활약했으며 지난해에는 국립발레단의 '포이즈'와 '단' 등의 무대 디자인과 연출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정 전무의 퇴사가 조직 변동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을 조심스레 내놓고 있다. 제일모직 패션사업이 삼성에버랜드로 양도되면서 브랜드 운영에 예전처럼 정 전무의 뜻이 반영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정 전무는 제일모직이 패션사업 양도를 발표한 지난 9월 이후 퇴사를 공식적으로 밝힌 첫 임원이다.
이에 대해 제일모직 관계자는 "여러 차례 퇴사를 만류했으나 정 전무 본인이 개인 비전에 따라 결정한 것이라 (제일모직은) 오히려 아쉽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정 전무는 자리를 비우지만 시스템 경영을 하고 있는 제일모직은 그가 없어도 구호를 글로벌 명품 브랜드로 키워나갈 생각"이라며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세워지지는 않았으나 조만간 수석디자이너를 추가로 영입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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