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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의 경제면에는 "한국이 '빨리빨리'라는 구호를 벽장에 넣고 노동시간 줄이기에 나섰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또 이 신문은 "오는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앞두고 있는 아시아의 네 번째 경제대국 한국에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재벌기업들에 대한 규제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면서 선심성 노동정책을 한국 정치권이 쏟아낼 것임을 예고했다.
르피가로의 이 같은 예고가 국내 산업계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발표한 '2012년 노사관계 전망조사'에 따르면 응답기업의 56.5%가 "올해 노사관계가 전년보다 불안해질 것"이라고 응답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총선과 대선 등 선거정국(76.7%)'을 꼽았다. 기업의 인사노무 담당 임원 26.1%는 '정치권의 친노동계 행보 증가'가 노사관계의 최대 불안요인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같은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정치권은 새해 벽두부터 여야 할 것 없이 노동계의 표를 의식한 정책들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서울경제신문이 최근 정치권에서 내놓은 주요 선심성 법안들을 살펴본 결과 사실상 민간기업을 정부 통제하에 두고 좌지우지하겠다는 법안들이 대부분이다. 개별 기업의 상황이나 사회적 여건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 내용들만 가득하다.
정치권의 표를 얻기 위한 발언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여야 따로 없이 노동대책에 관해서는 모두 야당이 돼 한목소리를 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합의를 통해 이끌어낸 법안 자체도 무효화하겠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어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상황에 이르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지난달 말 경제민주화특위를 통해 동일가치노동ㆍ동일임금 원칙하의 차별시정제도 개선, 비정규직 고용안정수당 도입, 세액공제제도 도입을 통한 비정규직 축소, 사내하도급 보호 등의 대책을 제시했다. 통합진보당은 한발 더 나아가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 기간제 사유 제한, 파견법 폐지, 동일노동ㆍ동일임금 법제화, 최저임금 인상 등을 내놓았다. 양 당의 차이는 있지만 최저임금은 노동자 평균의 50%로 올리고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 대비 80% 이상으로 하는 등 노동자의 권익을 높이고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을 정규직에 맞게 높여가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여당인 새누리당도 이달 초 비상대책위가 ▦비정규직에 대한 임금 및 근로조건 개선 ▦공공부문의 경우 2015년까지 비정규직 고용 전면 폐지 ▦사내하도급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 등을 담은 비정규직 정책을 내놓았다.
정부가 상생ㆍ공생을 주장하자 정치권은 이에 화답해 정책들을 쏟아내는 중이다. 가장 대표적인 법안이 노조법 전면 개정안이다. 근로시간면제한도제도(타임오프제)를 폐지하고 노조전임자의 임금지급을 각 사 노사의 자율에 맡기며 복수노조가 개별적으로 사측과 자율교섭을 할 수 있게 하자는 것. 10년 넘게 걸려 어렵사리 만들어낸 법안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폐기하자는 내용이다.
현장에서는 대부분의 기업이 노조와 새로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을 준수하며 노사관계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양대 노총은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무력화하고 교섭창구 단일화를 반대하며 노조법 전면 개정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황인철 경총 기획홍보본부장은 "산업현장의 노사관계 선진화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노조법 재개정을 내세운 정치투쟁에 매달리는 것은 노동귀족들의 밥그릇 지키기에 불과하다"며 "정치권은 산업현장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무책임한 노조법 재개정 주장에 동조하는 것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생각도 단순히 잡셰어링 차원에서만 접근할 수 없는 문제다. 정부는 근로시간을 줄이면 25만개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청년실업도 어느 정도 해소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기업에만 강요할 문제는 아니다. 한 10대 기업의 임원은 "기업의 자발적 참여도 필요하지만 근로자들이 먼저 양보하고 변화해야 한다"며 "업무시간은 줄어들지만 임금은 그대로 받으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노동문제 해결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정치권이 나서서 비정규직 문제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보호받고 있는 정규직의 권리를 줄이는 데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김용성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임금과 근로조건을 따져봤을 때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이 상대적으로 차별을 받는, 반대로 말하면 정규직이 과보호받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대기업에 비해 비정규직 비중이 오히려 높은 중소기업들의 인력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이를 적절하게 규제할 수 있는 대책을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고용안정은 물론 차별을 없애고 사회적으로 보호한다는 정책 목표가 함께 제시돼야 기업들의 부담도 덜면서 유연하게 노동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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