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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구겨진 국가체통(사설)

1997년 12월 3일은 한국사람이라면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날이 됐다. 한국 경제사에도 큰 글자로 기록될 날이다.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어쩔 수 없이 두손을 들고 신탁통치 문서에 사인한 날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자존심, 국민의 체면이 여지없이 망가졌다. 이제 적어도 1년반 우리 경제는 혹한기를 맞게 됐다.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고통과 시련이 국민들에게 짐지워졌다. 부끄럽기 짝이 없다.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분노를 느끼게 하는 것은 신탁통치의 수용 뿐 아니다. IMF와의 협상과정에서 보인 정부의 능력과 자세가 국민의 자존심을 더욱 상하게 했고 「모두의 책임론」이 또 한번 분통을 터뜨리게 하고 있다. IMF와의 실무협상에 부총리가 참석한 것은 모양이 좋지 않았다. 상대편 대표와 어울리는 지위의 사람이 참석했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난제가 생겼을 때 후선에서 조언·조정할 완충역이 없어진 것이다. 물론 국가부도위기라는 급박한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급할 수록 여유를 갖고 차분히 따지고 짚을 것은 짚어야 하는 것이다. 협상이란 원칙과 격식도 중요한 것이다. 허겁지겁 서두르다가 국무회의를 두번씩이나 불발시킨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나라 체통이 말이 아니게 됐다. 더욱 통탄할 일은 대통령 후보 3인의「연대보증」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우회서명 형식을 빌리기는 했지만 국가체면은 여지없이 짓밟혔다. 과거 IMF가 지원했던 다른 나라에서도 있었던 일이라고 하니 조금은 위안이 될지 모르나 현 정부가 얼마나 신뢰를 잃고 깔보였으면 그랬을까, 굴욕을 느끼기 이전에 자탄이 앞선다. 그도 그럴 것이 지도력 부재인 가운데 정부는 허세만 부렸다. 외환보유액이 바닥이 나는 데도 끄떡없다고 큰 소리치며 위기를 숨기고 속여왔다. 우리국민도 못 믿는 정부를 IMF인들 믿어줄 리 없다. 자업자득이겠으나 그렇다고 실추된 신뢰를 다음 정부에 유산으로 넘겨줘서는 안될 일이다. 정부는 이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을 분담하자고 호소한다. 더욱 부당한 것은 모두의 책임론이다. 괜찮은 경제를 물려받았으나 지난 5년동안에 국가부도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국내외에서 수도없이 충고와 경고가 있었지만 정부당국자들은 사태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그나마 미온적인 대책마저 번번이 실기했다. 누가 이꼴로 만들었는데 책임져야 할 책임자는 사과한마디 없이 모두의 책임이라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경제청문회」라도 열어 따지고 책임자를 가려 문책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국민이 흔쾌히 고통을 분담하며 이 위기가 경제회생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선 상처입은 국가 체면과 국민 자존심을 달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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