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75가지는 이렇게 될 자리. 10급짜리 하수들처럼 이렇게 단순한 수순을 흑쪽에서 치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백의 호조를 말해 준다. 흑은 좌하귀에 20집이 넘는 확정지를 마련했지만 원래 10집은 진작에 지어져 있던 터이므로 실제로 추가시킨 것은 10여집에 불과하다. 그런데 백이 새로 얻어낸 외세의 부피는 엄청나게 크다. 여기서 승부의 저울추는 급속히 백에게 기울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박정상은 ‘이것으로 이겼다’고 76에 틀어막았는데 이 수가 안일했다. 구리는 즉시 77로 붙여 중앙 백모양을 폭파하겠다고 나섰는데 이 수가 의외로 유력했으니…. 백76으로는 참고도의 백1로 뛰어들어야 했다. 흑은 2로 붙이는 정도인데 그때 3으로 점잖게 보강한다. 이 코스였으면 백의 낙승이었다. 이직도 좌상귀 방면의 흑이 미생이므로 흑A 같은 도발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박정상은 이런 게 문제예요. 패기와 박력은 좋은데 기껏 우세를 확보해 놓고서 그것을 승리로 연결시키는 요령이 서툰 편이에요. 그것만 보완하면 최정상급으로 올라갈 겁니다.” 그와 동문수학한 박영훈이 이 바둑을 보고 한 말이었다. “뭐 아직 백이 나빠진 건 아녜요. 끝내 버릴 찬스를 놓쳤다는 것뿐이지요. 선택하라면 백을 택하겠습니다.” 검토실의 목진석이 말한다. 아직도 백이 유망한 바둑이라는 것이었다. 좌하귀에서 워낙 이득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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