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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한라산은 한마리 흰사슴
입력2002-01-17 00:00:00
수정
2002.01.17 00:00:00
한라산 백록담, 눈보라속 헤치며 4시간바람이 세차다. 갑자기 굵어진 눈발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게 아니라 지향없이 내날리고 있었다.
악천후 속 긴 산행에 정신까지 혼미하다. 4시간 30분만에 오른 한라산 정상, 흰 사슴(백록)의 눈망울을 닮아서 곱다던 백록담이다.
그러나 그 눈망울(백록담)엔 눈물(담수)마저 말라 초라해진 모습이었다. 눈보라 속 백록담은 슬픈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뒤늦게 생태계를 위한다며 동절기만 입장을 허용하는 등 부산한 대책을 세웠지만, 언제나 백록담의 옛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아득할 뿐이다.
그래도 산을 벗하는 이들에게는 겨울이나마 분단 조국 남녘땅의 최고봉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게 여간 다행이 아니다.
1,950m의 고지를 밟고 서는 장쾌한 산행이 으뜸의 맛이요, 외유내강의 넉넉한 품에 안기는 행복이 그 못지 않은 즐거움이다.
한라산 정상은 올해 2월말까지만 일반에 개방되고, 등산길도 동쪽 성판악과 북쪽 관음사 두 길만 백록담까지 열려 있다.
산에 오르기 시작한 시각은 아직도 어두컴컴한 오전7시. 오르막은 성판악 길, 내리막은 관음사 길로 잡았다.
산행 소요시간은 9시간, 예정대로라면 오후 3시까지는 관음사 매표소에 닿아 있을 것이다. 수시로 변덕을 부린다는 한라산의 날씨가 걱정이다.
동쪽 길인 성판악(750m)에서 한라산 정상(1,950m)까지는 9.6km. 거리가 먼 대신 경사가 완만하고 길 정돈이 잘 돼 있어, 산에 오르기에 큰 무리가 없는 길이다.
성판악 길 입구, 산에 오르기 앞서 등산화 끈을 조여 매는 이들의 손놀림이 바쁘다. "이 얼마 만에 보는 백록담인가?" 한 초로의 등산객의 목소리가 들떠있다.
환하게 웃는 그의 입가에 하얀 입김이 희망처럼 피어났다. 연중 겨울에만 개방한다는 희소성 때문인지, 이번 등반에는 유난히 연로한 등반객들이 많다.
1시간 30분가량 걸어 속밭에 이르니, 어느새 아침해가 미명을 거둬가 버렸다. 물 한모금 마시고 걸음을 재촉해 사라악을 거쳐 진달래밭까지 내달았다. 중간 중간에 만만치 않은 경사길에 땀을 흥건히 빼고 식히기를 여러 번, 바삐 걸었건만 진달래밭에 이르니 3시간 반이 훌쩍 지났다.
"이런 낭패가!" 각종 주전부리 거리에 컵라면까지 판매하는 진달래밭 매점만 믿고, 도시락 외에는 다른 먹을 거리를 준비하지 않아 곤욕을 치르게 생겼다. 매점 주인 하는 말이 "갑자기 몰려든 등산객 때문에 온갖 음식이 동이나 버렸네요." 주린 속에 맥이 탁 풀렸다.
쓴 커피 한잔으로 몸을 데우고, 백록담으로 향했다. 정상이 눈 앞에 보이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백록담이 우리를 반기는 모양이야." 무리지어 올라가는 일행들은 눈이 즐겁기만 하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니 눈발도 굵어지고, 바람이 세차서 제대로 눈도 뜰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다. 백록담은 눈보라에 가려 희미하다. 인간의 욕망에 야윈 백록담을 뒤로 하고, 관음사 방향으로 하산 길을 잡았다.
갑자기, 그 많던 사람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거센 눈보라에 발자국도 모두 지워져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겨울철 관음사 길은 난다 긴다 하는 산악인들이 겨울 훈련지로 유명한 곳이다. 관음사 길을 오르내릴 때는 반드시 단체로 행동할 것을 당부한다.
길은 가파른데다 눈까지 수북해 아이젠도 별 소용이 없다. 인적 없는 산길을 수 십분 걷다가, 오랜 공복감을 참을 길 없어 아무데나 걸터앉아 도시락을 폈다. "부스럭." 산짐승인가? 사람이었다. "30분쯤 내려가면 용진각 대피소예요." 갑작스런 안도감에 다시 기운이 살아났다.
용진각 대피소에 이르자 비로소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꾸벅인사가 절로 나온다. 초면에도 도시락을 함께 펴고, 음식을 나누며 훈훈한 오찬을 즐겼다.
탐라계곡, 구린굴을 거쳐 관음사 매표소에 다다르니 오후 4시. 예정 시간을 1시간 넘겼다.
산행준비에 소홀했던 대가이다. 항상 부드러운 눈길로 제주를 굽어보는 한라산, 겨울 종주산행에서 그 산의 강인한 속내를 느낄 수 있었다.
<여행메모>
■ 현지교통
제주시터미널 또는 서귀포터미널에서 시외버스 이용, 성판악 휴게소 하차 (35분소요)
■ 등반 코스
▦오르막= 성판악~(3.5㎞)~속밭~(2.1㎞)~사라악~(1.7㎞)~진달래밭~?(2.3㎞)~정상.
4시간30분 소요. ▦내리막= 정상~ (1.5㎞)~용진각~(1.5㎞)~탐라계곡~(1.7㎞)~구린굴~(1.5㎞)~관음사. 4시간30분 소요.
■ 여행상품= 미사연산악회(02-592-5334)는 2월말까지 4차례에 걸쳐 한라산 백록담 등반 상품을 선보였다. 천지연폭포, 오름 산행, 성산일출봉 등반 등이 여정에 포함돼 있다.
1월 7~9일과 24~26일, 2월 4~6일과 25~27일. 참가비 21만원.
■ 문의
성판악 매표소 (064)758-8164, 관음사 매표소 756-3730.
문성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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