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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기기를 제조하는 중소기업 A사는 명절 때마다 직원들에게 지급하던 '떡값'을 올해는 접어두는 분위기다. 회사의 한 관계자는 "주요 수출 지역인 유럽이 경제위기 직격탄을 맞으면서 경영환경이 악화됐다"며 "지난해 매출도 전년 대비 감소세인데다 돈줄이 말라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심정"이라고 전했다.
대기업 납품 비중이 높은 전자부품업체 B사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업체의 한 관계자는 "납품업체 대금과 직원들 임금 지급 등을 위해 연초에 자금이 몰려 상여금은 대폭 줄일 계획"이라며 "고유가와 원자재값 상승에 전기요금까지 올라 한숨만 나온다"고 말했다.
유럽발 재정위기가 실물경제 침체로 이어지는 가운데 중소기업계에 냉기가 확산되고 있다. 위기가 현실화되는 지표로 꼽히는 재고량이 쌓여가고 자금난도 가중되는 상황이다.
송종호 중소기업청장은 11일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생산감소가 아니라 재고를 봐야 하는 데 지표를 보면 재고가 서서히 올라가고 있다"며 "그만큼 시장이 어려워졌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실제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1월 그린북(최근 경제동향)을 보면 반도체 및 부품과 기계장비의 재고가 각각 6.4%, 기계장비 8.6% 전월 대비 증가했다. 중기청의 한 관계자도 "건설ㆍ가전ㆍ조선산업의 위축으로 철강재 재고도 증가세"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자금 유동성. 지난 10월 말 현재 중소기업대출 잔액은 462조9,000억원으로 전월 대비 2조4,000억원 증가했고 연체율도 1.83%로 0.27%포인트 상승했다. 11월 중소제조업 자금사정 실적(SBHI)은 80.9로 10월보다 2.3포인트 하락했다.
지역 은행에 따르면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이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대출상환이 어려워 만기연장을 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부는 판매대금 회수 지연까지 겹쳐 전기요금 등의 세금ㆍ공과금을 연체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실적악화로 여유자금이 부족한데다 상반기 경기전망이 좋지 않아 자금확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은행의 대출 문턱은 높다.
한 중소업체 관계자는 "운영자금을 구하려고 했지만 매출이나 담보가 변변치 않다 보니 번번히 어렵다는 답변만 들었다"며 "일부 알짜업체들만 지원혜택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대기업의 실적이 중소기업으로 온기가 전해지는 낙수효과가 사라지면서 양극화도 심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격경쟁력 강화와 현지화 전략을 위해 대기업들이 해외생산 비중을 높이면서 지역 협력업체들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이다.
스마트폰의 경우 수요 증가세를 보이고 있지만 해외생산 비중이 지난해 1ㆍ4분기 19.3%에서 3ㆍ4분기 60%로 늘어나면서 구미산업단지 전자제품 수출액은 2007년 270억달러에서 지난해 9월 기준 169억달러로 급감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조사 결과 삼성전자 광주사업장이 세탁기ㆍ냉장고 등 백색가전 생산물량을 해외공장으로 밀어내면서 지역 업체의 44.5%가 경영상태가 어렵다고 답했다.
부산ㆍ경남 지역에서는 조선 관련 중소 업체들이 대형 조선소의 신규수주가 하청업체 발주로 직결되지 않아 매출이 부진한 상황이다. 고부가가치 특수선 업황은 호조지만 핵심부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일반선박 부품을 납품하는 대다수 중소기업의 사정이 나빠졌다.
중소기업들의 어려움은 앞으로 더욱 가중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기중앙회가 조사한 중소 제조업체들의 1월 경기전망지수를 보면 83.7로 2년9개월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4개월 연속 하락세며 2009년 5월 85.2를 기록한 데 이어 가장 낮은 수치다.
오디오 관련 기기를 생산하는 중견기업의 한 관계자는 "평소라면 설을 앞두고 신년 분위기에 들떠 있을 시기지만 올해는 부진한 실적 탓에 사내에는 냉기만 흐르고 있다"면서 "올해도 내수가 회복될 만한 상황이 아니라 고전할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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