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汎)현대가의 현대상선 정관변경안 반대는 현대그룹의 안정적인 지분확보 작업에 대한 직접적인 비토(거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그동안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오던 현대백화점그룹이 가세했다는 점에서 예전과는 사뭇 강도가 다르다. 일부에선 ‘그동안 은인자중하던 범현대가가 드디어 현정은 회장 측을 고립시키려는 것 아니냐’고 바라볼 정도다. 그만큼 현대그룹 측은 당혹해하는 모습이었다. ◇재연된 감정다툼=현대상선은 전환사채(CB) 및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 등 문제가 제기된 정관뿐 아니라 증권거래법ㆍ근로자복지기본법 개정 내용 등을 반영하려는 시도조차 무산되자 허탈함을 드러냈다. 주총에서는 현대상선이 제안한 21개 정관 변경에 대해 다음카페 소액주주모임, 현대삼호중공업 등이 공개적으로 전면 부결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현대중공업과 일부 소액주주 등의 반대는 이미 예상된 것이었다. 이들의 반대발언 직후 한 소액주주는 “CBㆍBW 발행 여부를 이사회 결정만으로 가능하게 한 조항은 문제가 있지만 나머지는 통과시켜도 되지 않느냐”며 수정 통과를 제안했다. 노정익 현대상선 사장이 수정 제안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려 했지만 지분 2.2%를 보유한 현대백화점 대리인이 정관변경안 전면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게임은 싱겁게 끝이 났다. 현대상선은 이날 주총 이후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뚜렷한 설명도 없이 문제가 제기되지 않은 조항까지 부결한 것에 대한 서운함을 나타냈다. 현대상선은 “현대중공업그룹과 KCC 측은 자신들이 이미 개정한 것과 동일한 내용의 정관변경안에 대해 반대했다”며 “동일 사안에 대해 자신들이 하면 ‘회사의 발전’을 위한 것이고 현대상선이 하면 ‘주주이익 침해’냐”고 따져 물었다. 노 사장은 주총 직후 기자들과 만나 “주요 주주들과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했다”고 평가하고 “다음 주총에서 다시 변경을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현대그룹 전략 차질 불가피=현대상선은 정관 변경을 통한 이사회 권한 강화로 경영권 안정을 다지고 현대건설 인수자금 확보를 용이하게 하려 했던 종전의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당초 현대상선은 정관 변경작업을 끝내면 해외 제휴 해운사들에 CBㆍBW 등을 넘겨 글로벌 제휴망을 공고히 하고 경영권 안정을 도모하려 했다. 이를 위해 기존의 ‘신기술 도입이나 재무구조 개선 등을 위해 CBㆍBW를 발행할 수 있다’는 정관을 ‘거래 또는 업무제휴 기업에 주식을 배정할 수 있다’로 바꾸려 했다. 노 사장은 이와 관련, “세계 해운업계가 인수합병(M&A)과 업무제휴를 통해 덩치 키우기에 나서고 있어 계열 해운사와의 지분 상호교환을 통한 제휴 강화가 절실한 상황”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번 주총결과는 현대그룹이 사활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현대건설 인수작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다. 현대그룹은 그룹의 모체이자 현대상선 지분 8.30%를 보유한 현대건설을 인수, 적통성을 되찾고 현대상선 경영권을 공공히 해 새로운 도약을 이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주총에 따라 현대건설 인수자금 확보에 비상등이 켜진데다 범현대가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오히려 현대건설 인수전에 경쟁자로 뛰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현대중공업 측의 입지가 공고해져 현대그룹의 미래 전략 구상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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