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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년만에 '最古' 간판 내린 조흥은행
입력2005-12-30 11:06:17
수정
2005.12.30 11:06:17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인 조흥은행이 창립108주년만에 간판을 내리게 됐다.
신한금융지주에 매각된 지 2년만에 이제는 '조흥'이란 이름까지 한국은행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다만 존속법인명에서 '조흥'의 이름이 남아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켰다.
1897년 창립된 조흥은행은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 은행권 부동의 1위자리를 지켰다.
2000년대 들어 격심한 '서열 변화'를 겪기는 했지만 외환위기전 은행 순위를 매길 때면 언제나 `조(조흥은행), 상(상업은행), 제(제일은행), 한(한일은행), 서(서울은행)'였다.
한성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창립된 조흥은행은 '당나귀 대출'로 은행업의 터를 닦았다.
당시만 해도 집이나 부동산보다는 당나귀가 가장 흔한 담보로 취급됐었다.
한성은행은 그러나 1920년대 초 전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여파로 경기가 악화되면서 은행 경영에 큰 타격을 받았다.
한성은행은 이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쳐 은행 체질을 개선, 1930년대부터는경영이 서서히 회복세를 탔고 1942년에는 고질적이었던 연체 대출금 상각을 완료하면서 재도약의 기반을 다졌다.
그 과정에서 조흥은행은 통폐합과 합병을 통해 몸집을 크게 불렸다.
일제는 만주.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전시금융 체제 구축이라는 명목하에 금융기관 통폐합을 강행했고 한성은행은 이를 통해 1938년 1월 해동은행 업무를 인수하고 1941년에는 경상합동은행을 흡수.합병했다.
1943년에는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이 통합되면서 일제의 금융기관 통폐합 정책은절정에 달하게 되고 은행 이름을 오늘의 '조흥은행'으로 바꿨다.
해방 이후 조흥은행은 증시 상장(1956년), 민영화(1957년) 등을 거쳤고 1966년에는 총예금 160억원을 돌파, 국내 은행 가운데 수위의 자리를 차지했다.
1977년부터 온라인 시스템을 가동한데 이어 1982년에는 신용카드 업무를 개시했다.
그러나 조흥은행은 한국 금융사의 어두운 역사도 그대로 안았다.
1982년 이철희.장영자 부부 어음 편취 사건, 1983년 영동개발진흥 어음 부정 지급보증 사고 등으로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 1997년 이후에는 각종 비리사건에 연루되면서 경영이 악화돼 창립 100년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1997년 2월 한보 사태, 3월 삼미그룹 도산, 7월 기아그룹 부도 등의 잇따른 악재로 큰 타격을 입었고 그해 12월에는 외환위기로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을 받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1998년 4월 출범한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의 지휘 아래 강도높은 은행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조흥은행은 1999년 3월 충북은행, 9월에는 현대강원은행과 합병했다.
2000년 들어 잠시 흑자를 달성하면서 안정의 기미를 보이기도 했으나 대우 사태와 현대 사태 등으로 은행의 추가 부실 우려가 제기되고 주거래기업인 쌍용양회의유동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제2차 구조조정 대상 은행으로 거론되는 치욕을 맞았다.
80%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정부는 공적자금 회수 차원에서 조흥은행을 매각하기로 결정했고 김대중 정부가 마무리하지 못한 매각 협상을 현 정부가 이어받아 신한지주 계열사로 편입했다.
노조를 포함한 임직원들의 `독자 생존' 소망에도 불구, 100년을 넘게 이어온 국내 최고(最古)의 은행은 이날 통합은행명 결정으로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운명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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