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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7월 본격 영업을 시작한 영국 온라인 크라우드펀딩 업체 시더스는 지난해 어린이용 e메일 애플리케이션 개발업체인 벨기에 스타트업 메일리의 창업자금 모집을 주선했다. 메일리는 시더스에 일반청약을 위한 서류를 제출한 뒤 자금조달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15만파운드 정도만 모집하려 했지만 유럽 벤처캐피털 업체인 페이버가 메일리의 사업성을 높이 평가해 투자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단 이틀 만에 200명 이상 참여해 35만2,270파운드(한화 5억7,700만원)를 모으는 기염을 토했다. 일반 투자자들은 투자한 액수만큼 메일리의 주식을 받았다. 시더스가 이런 방식으로 지난해까지 자금모집을 주선한 스타트업은 60곳이 넘는다. 시더스는 투자자 이익금의 7.5%, 기업 모집금액의 7.5%를 수수료로 받는데 자금주선 기업 수를 꾸준히 늘리며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800% 넘게 성장했다.
다수의 소액 투자자를 대상으로 온라인을 통해 십시일반 투자금을 모으는 크라우드펀딩이 자본시장과 벤처 생태계의 새로운 먹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은행 대출이나 회사채 발행이 어려웠던 창업기업에 신속하게 종잣돈을 공급하는 젖줄 역할을 하면서 금융산업의 신규 수익원으로 주목 받는 것은 물론 벤처업계의 패러다임까지 바꿀 채비를 하고 있다. 나아가 창업촉진을 통한 일자리 창출까지 유도해 국가경제에 기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일찌감치 관련 제도를 정비한 해외에서는 크라우드펀딩 시장이 급속도로 몸집을 불리고 있다. 미국은 2012년 일명 잡스법(JOBS·Jumpstart Our Business Startups Act)으로 통하는 '창업기업지원법'을 통과시켜 크라우드펀딩 산업을 키우고 있고 영국과 일본 등도 증권형 크라우드펀딩을 제도화했다. 크라우드펀딩 정보업체 매스솔루션에 따르면 2012년 27억달러에 그쳤던 세계 크라우드펀딩 규모는 2013년 61억달러, 2014년 162억달러까지 급속도로 커졌다. 올해는 344억달러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도 최근 크라우드펀딩 산업을 키우기 위해 의미 있는 첫 삽을 떴다. 올 4월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증권형 크라우드펀딩 도입을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 그동안 국내 크라우드펀딩 시장은 척박한 편이었다. 크라우드펀딩은 크게 증권형과 대출형·기부형 등으로 나뉘는데 기부형(영화나 미술 프로젝트 등에 기부하거나 투자 후 물품으로 보상)과 대출형(개인이나 기업이 이자율을 제시하고 투자자에게 만기 상환)의 경우 일부 시장이 형성돼 있었지만 증권형(온라인상에서 투자자들이 기업 지분에 투자)은 마땅한 법 체계가 없어 활성화되지 못했다. 2008년 창업한 바이오 벤처기업인 오믹시스가 증권형 크라우드펀딩 중개업체 오픈트레이드를 통해 자금을 조달한 사례 등을 제외하고 대다수 국내 벤처기업은 해외 크라우드펀딩 업체를 통해 자금을 수혈했다.
하지만 2013년 6월에 발의된 증권형 크라우드펀딩 법안이 거의 2년 만에 통과되면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법안에 따르면 온라인 크라우드펀딩 중개업체는 금융당국에 등록하는 것만으로 사업이 가능하고 최소 자본금은 5억원이다. 자금조달을 원하는 스타트업은 증권신고서 대신 투자자들을 위해 기업 재무상황과 사업계획서 등을 제출하면 된다. 한 개 기업당 1년간 7억원 한도 내에서 크라우드펀딩을 통한 자금모집이 가능하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2년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던 크라우드펀딩 법안이 일단 정무위를 통과해 다행"이라며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인프라 구축이 마무리되면 이르면 오는 11월에는 국내에서도 크라우드펀딩이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크라우드펀딩이 금융산업과 벤처 생태계의 신규 수익원으로 부상해 업계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것으로 보고 있다. 매스솔루션의 한 관계자는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크라우드펀딩으로 스타트업에 투자해 큰 수익을 본 투자자들이 늘어날 경우 크라우드펀딩 시장 규모는 급속도로 커질 것"이라며 "그동안에는 기업들이 은행 대출이나 주식·채권시장을 통해서만 자금조달을 해왔지만 이제는 크라우드펀딩 중개업체들이 은행이나 증권사 못지않은 금융업체로 부상하면서 자본시장의 새로운 수익 모델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2006년 설립된 미국의 대출형 크라우드펀딩 중개업체인 렌딩클럽의 매출액은 매년 두 배씩 늘어나고 있다.
백여현 한국투자파트너스 대표도 "크라우드펀딩이 활성화되면 벤처캐피털이 투자하기 어려운 창업 초기 기업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 벤처 업계가 더욱 역동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크라우드펀딩이 일자리 창출 등 국가경제에 기여한다는 분석도 눈길을 끈다. 벤처업계에 따르면 크라우드펀딩 법안 통과로 앞으로 5년간 연간 최대 1조원의 민간자금이 2,000~3,000개 스타트업으로 흘러갈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는 상당수 스타트업이 제때 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제품 출시 시점을 놓치는 사례가 많았지만 크라우드펀딩으로 빠른 시일 내에 자금조달에 성공해 성장기반을 마련한다면 일자리를 늘리는 데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최근 17년간 새롭게 창출된 일자리의 65%를 신생 벤처 창업기업이 담당했는데 크라우드펀딩이 본궤도에 오르면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겨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크라우드펀딩의 효과가 기대보다 못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벤처캐피털 업체 대표는 "일반 소액 투자자들의 참여가 활발해야 시장이 커지는데 국내 투자자들이 아직 생소한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창업기업에 적극 투자할지는 의문"이라며 "해외에 비해 창업기업에 대한 인식도 좋은 편은 아니기 때문에 크라우드펀딩이 활성화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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