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삼성그룹의 경영진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 달 전 갑자기 닥친 리먼 파산 여파가 국내외 실물경기에 파급되면서 도저히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시계 제로'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당시를 회고하는 삼성전자 한 관계자는 "특히 해외시장에서 매출이 그야말로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며 "10년전 외환위기가 다시 오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 마저 들었다"고 말했다. 다른 그룹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해외 법인들은 본사에 '물건이 팔리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못 잡겠다'는 긴급 메시지를 타전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뒤 한국의 글로벌 기업들은 리먼 파산 악몽에서 벗어나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해외 경쟁사들이 실적 부진에 허덕인 반면 우리 기업들은 '어닝 서프라이즈' 장세를 연출하며 전대미문의 경제위기 속에서도 사상 최고의 매출 실적을 올렸다. 노키아, GM, 소니 등 내로라 하는 해외 명문기업들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등 우리 대표기업의 승승장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 리먼 파산 1년, 글로벌 시장을 넓혔다 리먼 파산 후 1년이라는 시간의 의미는 한국기업에게 다시 한번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는 게 김종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의 설명이다. 실제 반도체, 휴대폰, 철강, 자동차 등 주요 산업에서 한국 기업들은 전대미문의 금융위기 속에서도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높여 나가고 있다. 휴대폰의 경우 삼성전자는 올 2분기에 시장 점유율 19.7%를 기록해 '마의 벽'인 20% 돌파를 눈 앞에 두고 있다. LG전자까지 고려하면 30%가 넘는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다. 반도체의 경우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통합 점유율이 2분기에 57.2%를 기록하며 60%대 벽에 성큼 다가섰다. 자동차도 글로벌 시장에서 나 홀로 질주하며 미국시장 점유율이 사상 첫 7%대 벽을 넘어서기도 했다. 이외에도 철강, 조선 등 다른 분야에서도 우리 기업들은 해외 경쟁기업을 누르며 전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노키아, 도요타, 모토로라, GM, 아르셀로미탈 등 해외 경쟁기업들이 적자 지속이나 점유율 하락 등에 시달리는 동안 우리 간판 기업들은 지금껏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던 '꿈의 기록'에 성큼 다가선 것이 현실이다 이 같은 점유율 상승에 힘입어 올 2분기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된 회사들의 매출액은 지난 1분기 보다 5.05% 상승했다. 영업이익은 2분기에 전기 대비 104.7%, 순이익은 무려 746.2% 상승하는 놀라운 실적을 보였다. 삼성, LG, 현대ㆍ기아차 등 10대 그룹의 올 상반기 수출액은 108조1,000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103조8,000억원)을 능가했다. 10대 그룹의 매출액도 올 상반기 219조2,000억원으로 금융위기 전이 지난해 상반기 219조8,000억원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무디스는 최근 내놓은 '한국 기업들의 반등, 계속될 것인가' 라는 보고서에서 우리 기업들이 보여준 저력을 감안하면 원화 약세 등 수혜가 약해지더라도 경쟁사 대비 우위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 환율 효과,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한국 기업의 선전 원인으로 가장 먼저 꼽는 게 환율 효과다. 특히 원저, 엔고 현상은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 기업이 점유율을 끌어 올리는 데 톡톡히 한 몫을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기업의 놀라운 선전 이면에는 환율 효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종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이에 대해 "외환위기 경험에서 터득한 한국식 위기경영의 성과로 볼 수 있다"며 "이번 금융위기 과정에서 국내 기업들은 코리아 만의 독특한 위기경영을 정형화 했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금융위기가 본격화 되자 당장 우리 기업들은 CEO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위기를 공유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외환위기 과정에서 조직원들 간의 위기를 공유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은 위기경영, 시나리오 경영에 즉각 돌입했다. CEO부터 연봉 삭감 및 반납에 나섰고, 일반 조직원들도 '위기를 이겨내자'며 고통분담에 동참했다. 서구 기업들이 리스크 공유를 통한 고통 분담 보다 인력감축 등에 나선 것과는 대조적이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배상근 상무는 "위기 때마다 응집되는 한국식 기업 문화가 힘을 발휘했다"며 "이는 합리성, 효율성 등으로 대표되는 서구식 기업문화와는 차이가 있다"고 전했다. 여기에 위기 극복을 통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설정한 것도 한국 기업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글로벌 점유율을 높여 경기 회복 후 해외 경쟁기업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지향점을 설정한 것이 한 예다. 이를 위해 불황 중에서도 공격적인 해외 마케팅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우리 기업들이 리스크의 일상화를 추진해 왔고, 이 같은 결과로 인해 이번 금융위기 과정에서도 차분히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종년 수석연구원은 "5년 뒤 한국 기업의 선전이 지속된다며 전 세계가 '한국식 위기경영'에 주목할 것"이라며 "금융위기 과정에서 우리 기업들은 한마디로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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