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 3차 구조조정이 진행되던 지난해 5월, 업계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경영진단 잣대에 불만을 터뜨렸다. 자산ㆍ부채의 실사 기준을 6개월 만에 청산가치로 변경하면서 부실기관으로 내몰렸다. 대형 저축은행의 한 대표는 "1,000억원짜리 건물을 (공시지가 기준인) 300억원 정도로 계산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유조선이 기름을 싣고 오가면서 멀쩡히 영업을 하고 있는데 고철 덩어리로 값을 매기는 것과 같다"고 했다.
#2011년 성동조선은 유동성 위기가 깊어졌다. 자율협약 합의 후에도 지원 과정에서 채권은행 간 의견 충돌을 빚었다. 존속ㆍ청산가치를 두고 은행 간 평가 결과가 달랐다. 회계법인 실사 결과를 두고도 해석을 달리했다. 결국 신규 자금 추가 지원을 놓고 이견이 해소되지 않자 국민은행은 그해 말 "청산가치가 맞다"며 지원을 거부하고 채권단에서 이탈했다.
구조조정 절차를 밟고 있는 기업들이 벙어리 냉가슴이다.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인 만큼 실사 결과가 좋기만을 바란다. 워크아웃을 경험했던 한 건설회사의 재무담당자는 "회계실사 결과가 나올 때는 수능성적표를 받아보는 것처럼 떨린다"고 말했다. 문제는 실사 결과가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이다. 경제성장률이나 물가상승률 등을 몇 퍼센트로 설정하고 어떤 항목에 더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결과는 바뀐다. 회계법인의 한 관계자는 "실사는 국제 기준에 맞춰서 해야 하지만 미래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면서 "보통 의뢰자 입장에 맞춰 보고서를 내놓는다"고 말했다. 자칫하다 객관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얘기다. 금융감독 당국의 한 고위관계자도 "실사 결과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채권단과 대상 기업 모두가 어떤 결과가 나오든 수용한다고 합의한 회계법인이 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과를 놓고 채권단이나 기업이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실적 나빠진 금융회사 "지원 여력 없어"=1ㆍ4분기 은행 등 금융계는 쇼크 수준의 실적을 기록했다. 일부 은행은 영업이익이 반 토막났다.
그러자 금융회사들은 구조조정 기업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향후 경기 전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작용했다. 경기는 물론 업황도 좋지 않은데 무턱대고 지원했다 나중에 손실처리 해야 할 금액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높다.
과거 경험도 한몫했다. 2000년대 초 구조조정을 했던 현대건설이나 쌍용양회ㆍ쌍용ㆍ하이닉스 등이 1차 채무재조정 등을 통해 정상화 절차를 밟았지만 결국 업황이 더 악화, 2차ㆍ3차 채무재조정을 하면서 추가 손실을 봤다는 것이다. 쌍용양회의 경우 2001년 11월 1조6,500억원의 출자전환과 2,000억원 규모의 신규 자금 지원을 했지만 2년 뒤인 2003년에는 5,276억원의 추가 출자전환 등을 단행해야 했다. 구조조정에 잔뼈가 굵은 금융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무조건 보수적으로 회계실사를 유도해서 털고 가는 게 손실을 줄이는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STX팬오션에 대한 회계실사도 최근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팬오션은 371척의 배를 보유하고 있고 대다수가 장기운송계약을 맺고 있음에도 회계법인 실사에서는 미래수익을 반영하지 않았다. STX팬오션이 갚아야 할 부채는 그대로인데 보유 자산의 가치가 급감하다 보니 자본잠식이 우려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STX팬오션의 지난해 말 현재 자산은 7조1,501만원, 부채 5조3,712만원으로 자산이 부채보다 1조7,789만원 많았다. 하지만 이번 실사에서는 자산과 부채가 거의 같은 수준으로 파악됐다. 업계 관계자는 "대부분의 배가 장기간에 걸쳐 운항처가 정해져 있고 돈을 버는 구조이기 때문에 배의 가치를 평가할 때도 이 부분이 반영되는 것이 맞다"고 전했다.
◇대형사는 그나마 보호…중소업체는 채권단 뜻대로=덩치가 큰 기업은 그나마 당국이 관여하기 때문에 정해진 흐름대로 간다. STX그룹만 봐도 덜컥거림은 있지만 순차적인 자율협약과 STX팬오션 매각 등의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STX팬오션의 회계실사를 놓고 충돌이 있지만 의견 조율 수순으로 해석한다. 금융감독 당국의 한 고위관계자도 "산업은행이 STX팬오션의 (인수에) 부정적이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10월까지 시간이 있으니 섣불리 결론 내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중소건설회사 등 규모가 작은 곳이다. 정부 관심 대상도 아니고 최근 분위기를 감안하면 채권은행들은 무조건 털고 가려 하기 때문에 회생이 어렵다는 것이다.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벌써부터 살생부가 돌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면서 "유동성 위기에 빠지면 이번에는 회복되기 힘들지 않겠냐는 우려감이 높다"고 말했다.
물론 채권단도 할 말은 있다. 시중은행의 관계자는 "개별 은행의 건전성 관리를 이기주의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면서 "금융 당국이 다가올 경제 위기에 대비해 철저하게 평가하라고 하면서 지원은 지원대로 하라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냐"고 토로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